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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시민이다] 왜 지금 시민인가

중앙일보 2015.01.21 00:18 종합 29면 지면보기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왜 이 시점에서 ‘시민’인가? 우리가 매진해 왔던 ‘국민’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아니다. 마치 피륙이 씨줄과 날줄로 짜지듯 사회 역시 ‘공동체적 연대’(시민)와 ‘국가에 대한 헌신’(국민)으로 엮어진다. 하나가 빠지면 허술하다. 미국 대통령이 ‘친애하는 시민’, 프랑스 대통령이 ‘친애하는 동지’로 호칭하듯 미국인과 유럽인들은 국민보다 시민에 더 익숙하다. 국민이 되기 전 먼저 시민으로 성숙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주마다 법이 다르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구조대가 결성되고, 치안이 불안하면 보안관을 고용한다. 학교와 교회는 물론 마을의 공공 업무는 주민회의에서 결정하고 처리한다. 이른바 자치다. 유럽의 시민은 자치도시에서 성장했다. 신분질서에서 벗어난 도시민들이 상공업과 시장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자유와 협동정신을 길렀다. 동업조합·직능조합은 전통 귀족층에 대항한 작은 공동체였다. 사익 보존을 위해 공익이 중요하다는 역사적 교훈을 깨친 존재가 시민이다. 이들은 국민의 이름으로 전쟁터에 나갔지만 시민으로 복귀했다. 시민은 씨줄이고, 국민은 날줄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목격한 것이 바로 시민성 결여였다. 구조는 국가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타이태닉호 선장처럼 “한국인답게 행동하라”는 명령도 몰랐고, 설사 발령했다 해도 승무원들이 이해 못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공유코드가 없다는 사실을 아프게 확인시킨 사건이었다. 국가 개조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며칠 전, 아파트 화재 때 10명을 구한 밧줄 의인은 진정 시민이었다. 간판을 달면서 길러온 생업의 특기를 공존의 지혜로 연결한 사람, 자신의 생명만큼 타인의 생명도 소중함을 일깨운 사람이다.



 시민성은 참여와 협력에서 생겨난다.



 우리는 도시민을 그냥 시민이라고 부르지만 프랑스의 공민(Citoyen), 영국과 미국의 시민(Citizen), 독일의 성민과는 다른 뉘앙스를 갖는다. 유럽 시민이 주체적 개인이자 고유한 생활양식과 세계관을 배양한 계층을 뜻한다면, 한국의 도시민은 그런 수준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 일찍이 소시민(小市民)이라는 말이 더러 소설에 쓰이기는 했는데 1960년대 ‘국민의 시대’가 개막되자 시민 형성의 사회적·정치적 의미는 증발했다. 시민층은 형성됐으나 사회중심세력으로 자처할 정신적 자산 혹은 윤리코드가 발육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국의 시민계층은 정신적 무정형이 특징이다. 비록 권위주의 체제였지만 연대와 협력을 중시하는 주체적 개인들이 생겨나긴 했다.



 그런데 빈곤 극복과 국력 신장, 국가 안보를 위한 일사불란한 동원체제 속에서 국익에 헌신하는 수직적 관계는 강화됐으나 이웃과 공동체를 배려하는 수평적 관계를 배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수평적 관계, 즉 시민성(civicness)의 기반은 자발성이다. 사회적 갈등과 쟁점을 십시일반 해결해 본 경험이 있어야 남의 사정을 이해한다. 자제와 양보의 미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우리가 소망하는 ‘사회정의’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연대와 협력, 자제와 양보가 확장되는 참여와 공공성(publicity)의 공간에서는 국가 권력도 독주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걸 몰랐다. 60~80년대 확대일로에 있던 우리의 시민층은 지배층이 없는 빈 공간을 차지하려는 계층 상승 경쟁에 몰입했다. 학력과 연줄은 상향 이동의 가장 효율적인 무기였고 사회적 소양보다는 경제력이 우선이었다. 군부가 최상층을 차지했고 장·차관, 고위 관료, 재벌기업, 국회의원이 뒤를 이었다. 이것이 60년대 말 김지하가 우화에 빗댄 오적(五賊)이다. 원자화된 개인주의와 권리의식이 시민층의 정신적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 우리에겐 교양소설은 없고 성장소설, 성공신화가 있다. ‘정신적 무정형’은 서글픈 풍경이고, 지배층으로의 등극은 신나는 일이었다. 30년이 돼 가는 민주화 과정에서도 시민윤리가 무엇인지 딱히 말할 수 없게 된 배경이다.



 120년 전 우리는 ‘국가’와 ‘민족’을 발명해 여기까지 달려 왔다. 그것은 건강한 시민성에 기초하지 않은 불가피한 이념의 성곽이었다.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산업화와 민주화도 수직적 관계, 즉 ‘규모의 경제’와 ‘제도 개혁’에 성공했지 수평적 관계인 ‘경제적 합리정신’과 ‘민주적 습속’에는 매우 취약한 것으로 드러나지 않았는가. 주민단체,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 참여를 요하는 조직은 널려 있다. 시민 참여 없는 명망가 주도의 시민운동은 불가피하게 정치색을 띤다. 시민단체가 아니라 전문가단체, 주창단체다. 영국 성인은 80%가 시민단체 회원인데, 한국은 10%에 불과하다.



 수평적 관계망이 허술하면 시민윤리, 사회정의가 자라나지 않는다. 법치주의가 지배하고 사회가 험악해진다. 불평등, 실업, 복지, 인권문제를 두고 진영 간 다툼이 일어난다. 진보·보수 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신의 비용이 급증한다. 우리가 그런 문턱에 있다. 시민이 주체가 돼야 보수·진보 간 진부한 대립판을 깬다. 경제는 시간 단축이 가능해도 사회는 단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은 모든 국가가 입증한 역사적 명제다. 독일처럼 관심사에 따라 토론조직에 참여하는 ‘시민교육’이 중요하다. ‘시민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중앙미디어네트워크는 2015년 어젠다로 ‘이젠 시민이다’를 선정했다. 송호근 교수를 시작으로 기획 시론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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