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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안 하면 망국" 200여 년 지난 지금도 큰 울림

중앙일보 2015.01.21 00:03 Week& 6면 지면보기
피케티 논쟁이 한창이다. 토마스 피케티 교수는 『21세기 자본』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의 부의 불평등 심화를 지적하며 누진 소득세율을 최고 80%까지 인상해 불평등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그만큼 부의 불평등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불만이 누적돼 있다는 방증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개혁사상은 그 시대의 모순과 대중의 열망을 읽는 키워드다. 18세기 조선사회도 그랬다. 화폐 경제가 발달하고 사농공상에 기반한 신분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세상은 변했고, 사람들은 다른 사회를 기대했다. 실학은 그렇게 탄생했다. 실학을 집대성했다는 평가를 받는 정약용은 개혁을 꿈꿨다. 각종 사료와 교과서, 언론을 통해 조선 후기 등장한 실학과 정약용에 대해 알아봤다.


역사 NIE (22) 정약용

글=정현진 기자 자문=최미정 중동고 역사 교사



다산 정약용(1762~1836)



조선 후기 성리학·천문·지리·형법·행정·의학 등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남기며 실학을 집대성한 대표적인 실학자. 그는 행정·사법·토지·경제 등 사회의 각 분야에 대해 총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며 조선 후기 대대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정약용은 28세에 관직에 진출한 이후 정조(1752~1800)의 총애를 받고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승승장구 했다. 거중기·배다리 등을 설계하고 동서양의 건축기술을 집대성해 수원 화성 축조를 지휘하는 등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정약용의 삶은 크게 바뀌게 된다. 정조 사후 정국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특정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고 권력을 휘둘렀던 세도 정치 시대로 들어선다. 세도 가문은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순조 1년(1801년) 천주교도 박해사건인 신유박해가 벌어진다. 정약용의 가문은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난다. 정약용의 친인척 여러 명이 천주교 신자로 몰려 처형을 당했다. 정약용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지금의 전남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를 당해야 했다.



정약용이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전남 강진의 다산 초당.
 가문의 몰락과 억울한 유배에도 불구하고 그는 학문 연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가 남긴 저서 500여 권은 대부분 18년의 유배 생활 동안 지어진 것이다. 토지의 국유화와 재분배에 관한 정전제 구상, 화폐 유통 장려, 상인의 관직 진출을 막는 금고법의 철폐, 청의 선진기술의 도입, 과거제 개혁, 향촌제도의 개편 등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사회 개혁 사상을 제시했다.



사회가 변하다



18세기 들어 조선 사회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맞게 된다.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가하고 전국에 장시가 1000여 곳이 들어설 정도로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한다. 쌀·베 등 현물거래가 아닌 상평통보 등 동전이 1차 유통수단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일부 농민들은 대규모 농사를 짓는 광작 등을 통해 부농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공장제 형태의 민간 수공업이 넓게 행해졌고, 정부 주도로만 진행됐던 광산 개발도 전문 경영인이 임노동자를 고용해 운영하는 민간 개발이 많아졌다. 비상교육은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임노동자, 상업 자본가, 독립 자영 수공업자 등 새로운 계층이 나타났다”고 기술한다.



정약용이 관제·부역·토지 등 국가 행정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담은 『경세유표』.
 사농공상에 기반한 유교적 신분질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부 중인과 상민들은 공명첩을 사거나 양반의 족보를 사들여 양반 행세를 했다. 반대로 권력에서 밀려난 일부 양반들은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등 농민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기도 했다. 두산동아는 “경제적 변화는 농민들의 의식은 물론 사회 구조도 변화시켰다. 18세기 초 양반은 80여 년 전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었고 상민과 노비는 크게 줄었다”고 썼다. 지학사는 “지방에서는 부유한 농민의 요구로 서당이 세워져 서민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었다…교육 기회의 확대와 문화 활동 참여는 서민들이 사회 모순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고 적었다.



 하지만 대다수 농민의 삶은 여전히 처참했다. 리베르스쿨은 “대다수 농민은 부세와 고리대의 부담 등으로 토지를 헐값에 팔아 빈농으로 몰락해 갔다. 이런 농민들은 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농촌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고 썼다. 생산력의 증가, 민간 경제의 발달, 신분제의 붕괴 등 사회는 변해가는데 농민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지도층은 무능했다.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한 세도 정치가 펼쳐지면서 집권층의 부패는 날로 심해졌다. 대부분의 양반들은 농민을 수탈을 대상으로 보고 매관매직 등 자기 곳간 불리는데 혈안이 돼 있었다.



실학의 등장



실학은 17~18세기 조선 후기에 등장한 사회 개혁 사상이다. 실학자들은 관념론에 빠진 기존의 주자학과 길을 달리하며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에 입각해 진리를 탐구하는 태도)에 입각해 조선 후기 변화된 사회상에 맞춰 대대적인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이들은 크게 중농학파와 중상학파로 나뉘었다.



정약용이 설계했다고 알려진 수원 화성 축조에 사용된 거중기. 그는 성리학뿐 아니라 기술·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중농학파는 토지제도의 개혁과 자영농 육성을 주장했다. 유형원·이익·정약용이 대표적이다. 정약용은 토지의 국유화와 토지 분배를 적절히 조화시킨 정전제를 주장했다. 전국 토지를 국유화해 그 중 9분의 1은 공동경작을, 나머지 10%는 농민에게 분배해 농촌정착과 안정을 꾀하자는 내용이다.



 중상학파는 생산력 향상에 초점을 두면서 중농학파보다 더 급진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유수원은 사농공상의 구분을 신분이 아닌 평등한 직업으로 전문화할 것을 제안하며 신분제의 타파를 역설했다. 박제가는 상공업 중심의 사회 발전을 주장하며 근검절약보다 소비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학사는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는 박제가의 주장은 상공업을 진흥하여 국가의 경제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라며 “당시 상공업이 발달하고 국제 무역이 확대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런 실학자들의 개혁안은 대부분 현실화되지 못했다. 비상교육은 “실학은 실사구시를 바탕으로 한 실증적 성격의 학문이었다. 또한, 조선의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가진 민족적 성격을 띠고 있었고, 토지제의 개혁이나 상공업 진흥을 통해 사회 모순을 개혁하려는 근대 지향적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북학파의 주장은 19세기 후반 개화사상으로 계승·발전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실학자들은 정권에서 밀려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개혁안은 정부 정책으로 실현되지는 못하였다”고 설명한다.



집권층에 날카로운 비판



정약용의 사상과 주장은 그의 사후 17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울림이 크다. 그의 개혁은 일부 영역에 치우치지 않고 사람·제도·사법 등 사회 전반을 아우른다. 『목민심서』에선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도덕·인성·능력 등 지방 수령이 지향해야 할 통치의 방향을 서술했고, 『흠흠신서』에선 곡산부사로 재직했던 경험을 토대로 사법에 해당되는 판결과 형벌에 대한 규범을 제시했다. 『경세유표』에는 관제·부역·토지·과거제·군제 등 국가 행정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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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과 비리로 점철된 집권층에 대한 비판은 날카로웠다. 그의 정치사상이 집약된 『원목』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수령들은…사람들이 분쟁 해결을 위해 찾아가면 ‘왜 이렇게 시끄러우냐’고 번거로워하고, 굶어 죽는 사람이 있으면 ‘제 스스로 죽은 것일 뿐’이라고 한다. 곡식과 피륙을 바쳐 섬기지 않으면 몽둥이질을 하고 피가 흘러야 그친다. 날마다 거둬들인 돈 꾸러미를 헤아려 낱낱이 기록하고, 돈과 피륙을 부과해 전답과 주택을 장만하며, 권세 있는 재상가에 뇌물을 보내 뒷날의 이익을 기다린다.” 200여 년 전 지도층을 향한 그의 비판은 지금의 현실과 너무나 가깝다.



 언론은 그의 사상과 철학에서 정치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과 리더십을 발견한다. “다산은 ‘군자의 학문은 수신(修身)이 그 반이요, 반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다’라고 했다…청렴이란 목민의 기본 임무며 모든 선의 원천이요 모든 덕의 근본이라고 했다. 다산의 말이다. 수신 따로 목민 따로 있는게 아니라 수신이 곧 목민인 셈이다.”(중앙일보 2012년 4월 12일 ‘다산 정약용의 마음 리더십’)



 정약용의 개혁 정신은 지금의 정부를 향한 질타가 되기도 한다. “다산은 당시 조선을…썩어 문드러진 세상이라고 통탄했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는 말로 피눈물을 흘리며 집권 당국에 경고와 예언을 서슴치 않았다.”(월간 중앙 2012년 1월 1일 ‘왜 오늘도 다산인가-쉼 없는 개혁만이 나라를 살린다’) “다산은 인재의 선발과 운용을 중시했다. 그의 제안들은 당시로서도 파격적이었지만, 지금도 경영의 원리로 새겨들어야 할 합리적인 원칙으로 손색이 없다…과부의 아들이나 비첩의 자식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자는 그의 주장은 혁신적이었다.”(중앙일보 이코노미스트 2012년 9월 24일 ‘비첩 자식에게도 문호 개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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