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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아버지와 삼촌 셋·딸·아들·사위도 경찰 다 합쳐 147년이네요

중앙일보 2015.01.21 00:01 강남통신 8면 지면보기
이관범씨가 안방에 걸어 두고 보는 자신의 경찰 정복. 3년 전 정년퇴직을 했지만, 지금이라도 출동 명령이 떨어질 것만 같다. 김경록 기자
147년째 경찰로 살고 있는 가족이 있다. 서울 서부경찰서에서 경위로 근무하다 정년퇴직한 이관범(62)씨 가족 얘기다. 이씨의 선친과 3명의 작은아버지, 이씨 본인과 딸·아들·사위까지 총 8명, 3대가 경찰로 살았다.

전직 서부경찰서 경위 이관범씨

그는 2012년 12월 31일 정년퇴직했다. 그 후 경기도 파주로 이사해 작은 텃밭을 가꾸고 친구도 만나며 소일하고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출동 명령이 떨어질 것만 같아 안방 장롱에 걸린 정복을 보고 또 본다. 이씨는 “버려야지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고 했다. 이씨에게 경찰은 고되지만 보람되고 자랑스러운 운명이었다. 이씨의 선친은 7남매 중 장남이었다. 5남2녀인 선친의 형제 중 넷째 작은아버지를 제외하고 남자 형제는 모두 경찰이었다. 모두 30년 이상씩 경찰로 일하다가 정년퇴직했다. 이씨의 딸 이지선(31) 경사는 서울 창신동 창신기동대에 있고, 아들 이재승(29) 경장은 서대문경찰서 북가좌파출소에, 사위 김동오(33) 경사는 서대문경찰서 청문감사관실에 있다.

김소엽 기자


 
사진 크게보기① 이관범씨의 정년퇴직을 앞두고 찍은 가족 사진. 아내 유일자씨를 제외하고 모두 경찰이다. 사진 윗줄 중간부터 시계방향으로 사위 김동오 경사, 딸 이지선 경사, 이관범 경위, 아내 유일자씨, 아들 이재승 경장. ② 사복 입고 찍은 가족사진. ③ 딸 이지선 경사(오른쪽)와 사위 김동오 경사의 결혼 사진. ④ 2013년 경찰의 날 3대째 경찰인 ‘경찰 명가’로 뽑힌 날 찍은 이씨와 남매의 기념사진. ⑤ 아들 이재승씨가 순경에서 경장으로 1계급 특진한 지난해 10월 찍은 사진.


해방 직후 아버지는 경찰이셨다

이씨 가족 경찰의 역사는 선친 이계봉씨로부터 시작됐다. 선친은 1945년 8·15 해방 직후 전남 무안경찰서에서 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5년 후 6·25전쟁이 터졌다. 당시 빨치산들은 경찰 가족들을 제일 먼저 잔인하게 숙청했다고 한다. 이씨는 “동네 입구에 경찰 가족 사체가 굴비처럼 엮여서 걸려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끔찍했겠는가”라며 “아버지는 다행히 동네 분들의 도움으로 대나무밭 항아리 속에 숨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전쟁이 끝나고도 선친은 그 때 일을 떠올리며 힘들어하셨다. 선친은 이관범씨가 중학생이던 70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아버지가 그 일로 마음고생을 하다가 일찍 돌아가셨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선친의 제삿날 이씨의 집에 모였던 작은아버지들은 이씨에게 경찰이 되라고 권했다. 하루는 둘째 작은아버지가 아예 원서를 들고 오셨다.

83년, 이씨는 서른의 늦은 나이에 경찰이 됐다. 결혼한 지 꼭 1년 만이었다. 경찰 시험으로 영어·한문·국사 시험을 치렀다. 합격 후 6개월 간 당시 경기도 부평에 있던 중앙경찰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종로경찰서 순경이 됐다.

그는 “83년이면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이라 경호 근무가 많았다”며 “1년 간 경호 지원만 1000번을 넘게 했다”고 말했다. 종로는 청와대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비번일 때도 수시로 동원됐다. 그나마 경호 근무는 힘들지 않았다. 2부제 교대근무도 참을만 했다. 제일 힘들었던 건 시위진압이었다.

요즘은 신고제로 평화집회를 하지만 그땐 시도 때도 없이 시위가 있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시위가 일어나면 무조건 지원근무를 했다. 지방에도 6개월에 한 번 이상 배치됐다. 장기전이 될 때는 한 달씩 머물렀다. 도시락만 한 달 내내 먹기도 했다. 이씨는 “도시락은 딱 사흘 먹으면 그때부터 소화가 안됐다”며 “지금도 도시락은 별로 먹고 싶지가 않다”고 말했다. 


 


80년대, 경찰도 국민도 모두 울었다

기억에 남는 시위가 있느냐는 질문에 이씨는 한참동안 창 밖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일명 ‘건대사태’로 불리는 건국대 시위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건대사태는 86년 10월 전국 26개 대학 2000여 명의 대학생들이 서울 건국대에서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발대식을 했던 사건이다. 3000여 명의 경찰이 건국대 주위를 둘러싸고 학생들의 진로를 막았다. 2대의 헬리콥터에서 최루탄을 쏘고, 학생들은 돌·화염병·쇠파이프로 대항했다.

이씨는 “학생들이 민주화 운동을 하는 걸 알면서도 막아야 했다”며 “사람이란 게 그렇다. 옆 동료의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리고, 정신 없이 맞는 걸 보면 그 상황 자체에 이가 갈리게 된다”고 했다. 그 역시 주차된 차 안으로 학생들을 피해 숨어들었다가 차가 반파될 정도로 돌팔매질을 당하고 쇠파이프로 맞았다. 건대사태는 1289명이 구속 송치된 사건으로,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단일 사건 구속 기록을 세웠다.

그 후로도 이씨는 수없이 많은 시위 현장에 출동했다. 어느 날은 학생들에게 잡혀 60발 넘는 최루탄과 화염병 세례를 당하기도 했다. 그런 날은 속이 완전히 뒤집어져 일주일 가까이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이씨는 “학생과 경찰이 마주보고 피 흘리면서, 서로 상처 입고 상처 입히는 안타까운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87년 6월 전국적인 민주화 항쟁이 벌어졌다. 결국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민주정의당(민정당) 대표위원이 6·29 선언을 했다. 그 후 극렬했던 시위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시위가 줄면서 이씨에겐 경호와 민생치안 업무가 늘었다. 치안 업무를 담당하게 되면서 그의 24시간은 전보다 빠르게 흘렀다. 이씨는 “오전에 순찰하고 지구대에 복귀했다. 싸우는 사람도 있고, 길 잃은 아이도 있었다. 모두 안전하게 집으로 돌려보낸 후 한숨 돌리고 나면 다시 야간 순찰 시간이이었다. 순찰을 돌고 ‘잠까 쉬나’하면 술 취한 사람들이나 노숙자들과의 ‘한판 씨름’이 기다렸다”고 말했다.

딸은 경찰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

큰딸 이지선(31) 경사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이 경사는 스스로를 ‘운명적으로 경찰이 돼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경찰병원에서 태어나 은평구 신사동의 경찰조합아파트에서 시집갈 때까지 살았다. 이 경사는 경찰대를 졸업하고 2007년 경찰이 됐다. 첫 발령은 서울 홍은지구대였다. 정보과에서 외사업무를 봤다. 이후 서대문경찰서 정보계에서 4년 반, 외사계에서 반 년 있었다.

현재 일하는 창신기동대는 자원해서 왔다. 집회를 막는 일이다보니 불규칙하고 고된 일이라 자원율이 낮은 곳이다. 나태해지는 자신을 바로잡는 기회로 삼고자 자원했다. 이제 20개월 된 아들은 경찰청 어린이집에 맡긴다. 어린 아들을 남의 손에 맡기면서도 “경찰청 어린이집이 있어 걱정이 없다”며 “대대로 경찰 혜택을 보고 있는 셈”이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경찰의 딸이라는 생각 때문에 남보다 더 노력하고 더 바르게 행동하려고 했다”고 한다. 대학시절 친구들과 술 마시고 취해서 비틀거리며 걷다가도 경찰 아파트가 보이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에 힘주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아파트 단지까지 또박또박 걸어갔다.

어린 시절 그에게 경찰은 동네 주민이었고, 아빠 친구들이었고, 삼촌들이었다. 이 경사는 “어릴 때 아버지는 늘 낮잠 자는 사람이었다”며 “아버지가 잠들면 남동생과 둘이 아빠 정복도 만져보고 수갑도 만져봤다”고 했다. 한 번은 남동생이 아버지의 수갑을 가지고 놀다가 그대로 잠겨 혼이 나기도 했다.

다른 직업은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그는 “경찰에 대한 이미지를 부드럽고 친근하게 바꾸고 싶다”고 했다.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놀다가 차비가 떨어져 난감했을 때 경찰서로 가자는 그녀를 보고 친구들 기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경찰은 ‘무서운 아저씨’가 아니라 ‘친절한 삼촌들’이라며 친구들 손을 이끌었다. 한 술 더 떠 배가 고픈데 돈이 없다며 경찰 아저씨들이 끓여준 라면까지 먹고 무사히 집에 왔단다. 이 경사는 “길을 잃었을 때도 편안하게 경찰을 찾고, 개방 화장실이니까 화장실도 사용하고 그랬으면 좋겠다”며 “내가 경찰 아저씨들을 삼촌처럼 여겼듯이 많은 아이들이 나를 이모처럼 편하게 여길 수 있도록 더 노력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이관범씨 가족이 2013년 받은 ‘경찰 명가’ 인증패.
가족 셋을 경찰로 만든 아내

이씨 가족 중 유일하게 경찰 아닌 사람이 있다. 바로 이씨의 부인인 유일자(55)씨다. 유씨는 “3명이나 경찰을 만든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전국적으로 시위가 극심했던 80년대, 결혼 1년 만에 남편이 경찰이 되겠다고 했을 때는 극구 반대했다. 남편이 경찰이 되고도 80년대는 내내 마음을 졸이며 살았다. 유씨는 “당시만 해도 경찰에 대한 이미지가 안좋았다. 워낙 위험했던 때라 반대했다”며 “시어른 모두 경찰이셨기 때문에 새댁이 나서서 말릴 수도 없고 조마조마하게 살았다”고 털어놨다.

2006년 대학에서 관광학과를 졸업한 딸이 ‘경찰이 되겠다’고 했을 땐 ‘설마 되겠냐’했다. 하지만 딸은 경찰공부 6개월 만에 합격증을 받아왔다. 같은 경찰이지만 딸과 남편의 업무는 많이 달랐다.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하던 남편과 달리 딸은 다문화 아이들 같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일을 주로 했다. 집회를 막으러 간다 해도 달라진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2011년 아들이 경찰이 되겠다고 했을 때는 대찬성을 했다. 유씨는 “90년대 이후 치안이 경찰의 주요 업무가 됐다. 지역 주민을 살피고 봉사하는 경찰 본연의 모습이 가족인 나까지도 뿌듯하게 만들더라”며 “지금은 남편과 아이들, 사위까지 모두 경찰이라 자부심이 크다”고 말했다.

 명절이나 제사 때 작은아버지들까지 모두 모이면 “우리 집은 이대로 지구대 설립해도 된다”고 우스개 소리를 할 정도다. 대부분의 대화 주제도 경찰 업무다. 자신을 ‘반 경찰’이라고 소개하는 유씨는 “자녀가 장성하면 부모와 대화가 없어진다는데 우리 애들은 일주일이 멀다고 은퇴한 아빠를 찾아 조언을 구한다”며 “가족이 같은 일을 하는 데서 오는 장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경찰은 내 운명

이관범씨에게 경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냐고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아이들이 경찰이 되고 특진하고 그런 순간들도 행복하지만 2009년 겨울이 가장 행복했죠.”

2009년 서부경찰서로 다급한 신고 전화 한 통이 들어왔다. 인근 한 빌라 앞에 아기가 버려진 채 있다는 거였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아기는 갓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건지 양수와 피가 엉켜있었고, 탯줄도 그대로 붙은 채 얇은 보자기에 둘둘 말려있었다. 차디찬 아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버리더라도 옷이라도 입혀서 건물 안에 버리지’ 야속한 마음에 애가 탔다. 얼음장 같은 아기를 품에 안고 가장 가까운 산부인과로 달려갔다. 저체온증이 심해 위험하다며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자 의사들이 환풍기 여러 대를 돌려가며 가까스로 아기의 체온을 정상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그 밤이 다 지났다. 이씨는 “담당 의사 선생님이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하더라”며 “지금은 한 가정에 입양돼 아주 건강하게 잘살고 있다”고 말했다. 2010년 6월에 방영된 MBC 다큐스페셜 사랑, ‘크리스마스의 기적편’에 이씨는 성탄이 아빠로 소개됐다. 크리스마스에 찾아온 소중한 생명이라는 의미로 사람들은 아기를 성탄이라고 불렀다.

 이야기를 마친 이씨는 “생명공학과를 다니던 아들이 경찰이 되겠다고 하더니, 경찰인 딸은 경찰인 사위를 데리고 왔다”며 “일부러 이렇게 만들려고 해도 안 되는데 나는 영원히 경찰로 살 운명인가 보다 생각했다”며 웃었다.



 
자, 퍼즐 맞추기를 한번 시작해볼까요.

서로 아무 상관 없을 것 같은 보통 사람들의 개별 인생을 이어붙여 한국 현대사를 총정리하는 ‘당신의 역사’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따로 떼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다 맞추고 나면 원래의 큰 그림이 보이는 직소 퍼즐처럼 말이죠. 호텔업계와 영화계·교육계 등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보통 사람들의 특별한 인생을 퍼즐 맞추듯 재밌게 한번 이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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