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On Sunday] 임대주택과 ‘건축학개론’ 서연의 집

중앙선데이 2015.01.18 03:04 410호 31면 지면보기
메건(Megan)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로 연수 갔을 때 살던 아파트의 관리사무소 직원이었다. 우리의 관리사무소가 하는 일 외에 임대 업무도 하고, 공증 자격이 있어 자동차를 팔거나 입주자 명의로 전기를 연결할 때 필요한 공증 도장도 찍어줬다. 밝은 표정을 가진 30대 초반의 여성이었는데 2013년 12월 아파트에 도착하던 날 단지 내 세탁실·테니스장·놀이터 등 곳곳을 친절히 안내해 줬다. 이후에도 집 관련 일이 생기면 늘 깔끔하게 처리해 줬다.

정부의 중산층용 장기 임대주택 도입 발표를 보면서 메건과 예전의 그 아파트 단지가 떠올랐다. 250여 가구로 구성된 그 단지는 넓고 쾌적했는데 집 크기에 따라 임대료로 한 달에 900~1300달러를 냈다. 전기·수도·쓰레기 처리비용 등은 별도다. 거주를 위해선 한 달치 월세에 해당하는 돈을 보증금으로 미리 낸다. 주민들의 생활 수준은 비교적 넉넉해 보였다. 미국판 ‘중산층용 기업형 임대주택 단지’ 정도로 볼 수 있다. 단지 운영자는 ‘그레이 스타(GREY STAR)’라는 부동산 임대 전문회사다. 그레이 스타는 2014년 6월 현재 미국과 멕시코·영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38만5000가구의 주택을 임대·관리한다. ‘고객에게 최고의 주거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게 목표라고 한다.

그곳에서 1년 동안 잘 살기는 했는데, 보증금을 정산할 때 집이 더러워졌다며 청소비 등의 명목으로 80달러를 공제당했다. 인근 다른 아파트 단지에 살았던 한 연수생은 카펫 교체 비용으로 보증금에서 160달러가 까졌다며 분통을 터뜨렸던 기억이 난다. 벽에 못 하나 박지 않고 조심조심 살았는데도 보증금이 깎이는 게 드물지 않다.

정부는 고급 임대주택 사업을 육성하기 위해 대기업을 참여시켜 브랜드화하고 토지를 싸게 공급하며 취득세 감면 등 다양한 세제·금융 혜택을 줄 계획이라고 한다. 물론 필요한 지원이지만 그것만으로 임대 사업이 성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입지에 따른 입주자 유치, 생활편의 시설의 유지·관리, 수요와 공급에 따른 임대료 산정, 임대 종료 후의 비용정산 등 상당한 노하우가 함께 필요하다. 전문 인력도 키워야 할 것이다.

정부와 기업 양쪽 모두가 노력해 고급 임대주택 사업이 잘되면 중산층의 주거 안정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일이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에 ‘그래도 남의 집 살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영화 ‘건축학개론’에는 서연(한가인 분)의 제주도 집이 나온다. 그 집엔 어릴 적 아버지가 서연의 키를 재주던 흔적이 벽에 눈금처럼 남아 있다. 어린 서연의 발자국이 찍힌 수돗가도 있다. 서연은 그걸 보며 과거를 추억한다. 집은 단순히 주거 공간만은 아니다. 추억의 집합체이고 고향이고 뿌리다.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임대주택 말고 우리 모두가 마음에 드는 집에서, 어릴 적 키 재던 흔적이 남아 있는 내 집에서 평생 살 수 있는 날을 꿈꾼다면, 그건 몽상일까


염태정 경제부문 기자 yonnie@joongang.co.kr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