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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숙의 ‘新 名品流轉’] 이중섭의 은지화 전설이 되다

중앙선데이 2015.01.18 02:54 410호 29면 지면보기
이중섭이 1950~52년께 그린 은지화 ‘복숭아밭에서 노는 아이들’. 미국인 아서 맥타가트가 55년 구입해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기증한 작품으로 60년 만에 서울에서 공개됐다. [사진 갤러리 현대]
술과 더불어 오랫동안 인류를 위무해온 벗이 애물단지로 변하는 중이다. 건강을 위협하는 주범이란 악명도 모자라 서민 주머니를 털어가는 사치성 기호품이 됐다. 바야흐로 담배가 문명사에서 희미해져 간다. 이 대목에서 ‘오호, 통재라~’ 한탄할 화가가 떠오른다. 애연가였던 이중섭(1916~56)이다. 담배도 즐겨 피웠지만 그에게 더 중요한 건 담뱃갑 안에 포장재로 들어 있던 은종이였다. 궁핍한 시대에서도 가장 궁상스러운 화가였던 이중섭은 재료 살 돈이 없어 담배 향을 보존하기 위해 감싸고 있던 은지(銀紙)를 캔버스 삼았다. 이제 은지화(銀紙畵)는 ‘비련의 화가’ 이중섭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자 미술시장의 전설이 되었다.

은지화는 대략 세로 8.5㎝, 가로 15㎝ 크기다. 우편엽서나 어른 손바닥만 하다. 명칭은 정확히 말하면 ‘알루미늄 박지 그림’이다. 별다른 화구(畵具)는 쓰지 않았다. 1950~52년 부산 피란 시절에 집중해 생산됐다. 이중섭과 동시대를 살며 말년에 뭉쳐 다녔던 화가 박고석(1917~2002)은 옆에서 본 은지화 제작 기법을 특유의 필체로 남겼다. “은종이에 송곳으로 선을 북북 그은 위에 갈색을 대충 칠한 뒤 헝겊이라도 좋고, 휴지 뭉치라도 좋아라. 적당하게 종이를 닦아내면 송곳 자국의 선은 색깔이 남고 여백은 광휘로운 금속성 은색 위에 이끼 낀 듯 은은한 세피아 조가 아롱지는 중섭 형의 그 유명한 담배 딱지 그림.”

선 몇 가닥으로 형태의 본질을 잡아내는 드로잉은 ‘화골(畵骨)’이란 단어가 표현하듯 사물의 뼈대를 드러낸다. 이중섭은 특히 벌거벗은 아이들을 많이 그렸는데 은지화에 드러난 선묘의 직설적이면서도 깊은 맛은 가족에 대한 화가의 그리움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느끼게 한다. 서울 삼청로 현대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이중섭의 사랑, 가족’전(2월 22일까지)에는 은지화가 18점 출품됐는데, 이 중 3점은 60년 만에 귀향한 사연을 품고 있다. 55년 1월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열린 이중섭 개인전에서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 문정관이었던 아서 맥타가트가 구입한 것이다. 이중섭의 그림 세계를 일찌감치 알아보고 평가했던 맥타가트는 이 은지화를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보냈고, 이사회 의결을 거쳐 56년 소장품으로 결정됐다. 영문 머리 명을 붙여 흔히 ‘모마’라 불리는 이 미술관의 명성과 위상을 볼 때 50년대에 한국 화가 그림이 서양미술 1번지에 입성했다는 건 대단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중섭의 은지화는 현재 국내외에 90여 점 남아 있는 것으로 어림된다. 가끔 경매에 나오는데 낙찰가는 1억원에서 3000만원까지 편차가 있다. 세계 미술사에 폐품을 활용한 미술품도 많기는 하지만 이 정도 부가가치를 올린 작품이 있을까 싶다.


정재숙 중앙일보 논설위원 겸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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