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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신의 한 수' '악마의 한 수'

중앙일보 2015.01.15 00:05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정재
논설위원
‘신의 한 수’는 대개 두고 나서야 안다. 제아무리 입신(入神)의 고수라도 필연이란 날줄에 우연이란 씨줄이 겹쳤을 때만 착점(着點)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안종범 경제수석이 지난해 8월 ‘경제 살리기 법안 19개’를 처음 들고 나왔을 때, 이게 ‘신의 한 수’가 될 것으로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당시 “이것만 국회가 통과시켜 주면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했는데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게 야당에 경제 못 살리는 책임을 떠넘긴 묘수가 됐다. 그 후 틈만 나면 정부·여당은 “야당이 법안을 안 통과시켜 줘 경제가 죽을 쑤고 있다”고 공격했다. 야당은 ‘어어~’ 하다가 경제 못 살린 책임까지 뒤집어쓰게 될 판이다.



 나의 ‘신의 한 수’는 상대에겐 ‘악마의 한 수’다. 새정치민주연합 입장에선 뾰쪽한 대응책이 없다. 19개 법안 중 몇몇은 그야말로 아킬레스건이다. 당이 공식입장-당론(黨論)으로 반대하는 것들이어서 통과시켜주면 당의 정체성이 흔들린다고 안팎에서 믿는 것들이다. 예컨대 원격진료를 허용하자는 의료법을 새정련은 영리 병원→의료 민영화의 전초법으로 보고 있다. 결국 의료 양극화가 불 보듯 뻔해지는데 서민 정당을 내세우는 야당이 어떻게 받느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반대만 하기도 쉽지 않다는 게 고민이다. 세계 헬스케어 시장은 2200조원 규모, 국내만 약 75조원으로 추산된다. 일자리만 수십만 개 늘어난다. 세계 최고 수준인 국내 ICT(정보통신기술)를 잘 활용하면 마법의 연금술처럼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원격진료 허용은 그 시작이다. 여기서 막히면 세계 최고 ICT도 무용지물이다. 컬러TV 방송은 못 하게 하면서 컬러TV를 만들어 팔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한 야당 의원은 “개인적으론 법안에 찬성하지만 당론을 뒤집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경제 살리기 법안 19개’라는 프레임의 또 다른 강점은 뛰어난 확장성에 있다. 필요에 따라 30개, 50개로 쑥쑥 늘어난다. 손오공의 여의봉 뺨친다. 김한길 전 대표는 “여당은 법안이 무슨 여의주라도 되는 것처럼 몰아친다”며 일축했다. 사실 법안 몇 개로 경제가 확 살아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통과시켜 주지 않고 버티는 것도 상책은 아니다. 여당은 “잘 됐다”며 경제 책임론을 야당에 계속 덧씌울 것이다. 야당은 “가짜 민생법안”이라며 반발하는 게 고작이다. 그 정도로는 ‘국회 책임론=야당 책임론’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못 견딘 야당이 ‘대승적 우클릭’을 한다며 지난해 말과 올 초 부동산3법과 크루즈·마리나법 등을 통과시켜 줬지만 여당은 “아직 12개의 경제 살리기 법안이 남았습니다”라고 외치고 있잖은가.



 여당은 쉽다. 객관적 데이터와 법 통과 논리만 계속 공급하면 된다. 그럼 야당이 알아서 지리멸렬하게 돼 있다. 진영 논리로 편을 갈라 싸울 때는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외부의 목소리에는 귀를 막게 된다. 되레 진영 논리만 강화된다. 이미 갖고 있는 편향된 입맛에만 맞춰 정보를 처리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편향 동화(biased assimilation)’ 효과다.



 그럼 야당은 수가 없나. 있다. 집단 편향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내부의 목소리가 필수다. 새정치민주연합에도 목소리는 있다. 당내 민주정책연구원 이진복 연구위원은 올 초 “서민을 중산층으로, 중산층을 부자로, 부자를 세계적 갑부로 계층 상승시키는 전반적 상향 이동 전략”을 새정련의 장기집권플랜으로 들었다. 언제까지 부자·서민을 가르고, 있지도 않은 ‘상상 속 서민’을 타깃 삼는 정책을 펼칠 것이냐고 묻기도 했다.



 정부·여당이 가장 겁내는 시나리오도 이런 것일 것이다. ‘야당이 법안을 다 통과시켜 줬는데, 경제가 안 살아나는 것. 한심한 실력이 들통 나는 것. 그래서 무능한 정권이 교체되는 것.’ 반대의 경우도 있다. ‘법안 통과→경제 활성화→야당 지지율 상승→정권 교체’다. 어느 쪽이든 야당엔 꽃놀이패 아닌가. ‘신의 한 수’에 대한 응수는 또 다른 ‘신의 한 수’밖에 없다. ‘경제 살리기 법안 통과’가 바로 그것이다.



이정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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