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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천 드러난 기술 … 정유공장 늘리면 외국기업이 돈 벌어

중앙일보 2015.01.07 01:16 종합 4면 지면보기
모나미·동아연필은 익숙한 브랜드다. 하지만 이 제품을 문구점에서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연간 730억원 규모 필기류 시장의 97%를 외국 기업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업체들이 설계 특허 독점
1조 들여 설비 증설 땐 500억 떼가
국산 필기류, 국내 시장 점유율 3%
돈 더 주고 살 만한 상품 적은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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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있는 교보문고의 핫트랙스 매장. 한 여학생이 “쓸 때 느낌이 좋다”며 집어 든 펜은 일본 회사인 제브라의 드래픽스 샤프였다. 이 매장에 있는 14개사 89개 브랜드의 필기구 중 국내 브랜드는 단 2개뿐이었다. 대부분이 일본·독일 제품이다. 문구업체인 모닝글로리 관계자는 “선진국 업체의 고가 제품과 중국·동남아산 저가 제품 사이에 끼여 한국 제품의 위치가 애매한 상태”라고 말했다.



 매대에서 밀려나고 있는 한국 제품의 위기는 해외 시장에만 있는 게 아니다. 국내 시장에서도 산업용 제품부터 문구류 같은 생활용품까지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가격 대비 성능이 좋은 제품까지는 도달했지만 돈을 더 주고서라도 사고 싶은 최고 제품 반열까진 올라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밑천이 드러나면서 매대에서 밀려나고 있는 것은 문구만이 아니다. 기계·철강·자동차·정보기술(IT) 등 한국의 7대 주력 품목의 세계 수출시장 점유율은 2000년 3.4%에서 2013년 4.7%로 소폭 상승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중국산의 점유율은 2.2%에서 11.7%로 급증했다. 일본도 5.3%로 우리보다 여전히 높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일본은 엔저를 통해 가격 경쟁력을 높였고, 중국은 IT와 바이오 등 신사업을 적극 육성 중”이라며 “올해는 한국 제품의 점유율이 더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국가 전략기술에선 이미 중국이 한국을 훌쩍 앞선 분야가 적지 않다. 한국보다 중국 기술이 7.2년이나 앞서 있는 우주발사체, 미래형 항공기(3.8년), 자원 개발 처리기술(1.5년) 등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정유·화학에선 한국 기업이 1조원을 들여 공장 설비를 늘리면 외국 업체가 최대 500억원(5%)을 가만히 앉아서 벌어 간다. 엑손모빌 리서치앤드엔지니어링, 셸 글로벌 솔루션 등 선진 업체가 공정 설계기술 특허를 각각 3000개 이상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회사가 보유한 설비의 99%가 이런 형편이다.



중국도 후발 주자이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보다 더 발 빠르게, 훨씬 오래전부터 준비를 해 오고 있다. 중국 최대 석유기업인 시노펙(中國石化)은 이미 고부가가치 휘발유를 생산할 수 있는 생산공정(고도화 설비)을 자체 설계하는 데 성공했다. 1956년 시작된 중국 정부의 연구개발 지원이 빛을 발한 것이다.



 이런 격차를 단번에 줄이거나 역전시킬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은 기업 인수합병(M&A)이다. 지난해 상반기 전 세계 M&A(1조7700억 달러)가 1년 전보다 73%나 늘어난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그러나 한국 기업은 이마저도 뒤처지고 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국민연금과 기업이 반씩 갹출해 만든 ‘코파펀드’는 마음만 먹으면 약 9조원을 동원할 수 있는 상태다. 하지만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기업과 국민연금이 서로 약정한 금액에서 실제 집행된 것은 10% 수준에 불과하다.



김이석 시장경제제도연구소장은 “고속성장의 바탕이 됐던 과감한 돌파력과 기업가 정신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며 “올해가 경제혁신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위기의식을 정부와 기업 모두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이상렬 뉴욕, 채병건 워싱턴 특파원

김영훈·이수기·김현예·이현택 기자 filic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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