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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링지화는 왜 몰락했나

중앙일보 2015.01.07 00:05 종합 28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유상철
중국전문기자
중국에선 2014년 한 해를 부패척결 원년(元年)이라 부른다. 국가 지도자급 거물만 4명이 낙마했다. 문·무관의 최상위에 위치했던 저우융캉(周永康) 전 정치국 상무위원과 쉬차이허우(徐才厚) 전 군사위원회 부주석이 몰락했다. 세 차례나 성(省) 당서기를 역임해 중국 정계의 상록수로 불리던 쑤룽(蘇榮) 전 정치협상회의 주석도 철창 신세가 됐다. 그리고 연말엔 링지화(令計劃) 당 통일전선부장의 낙마 소식이 전해졌다.



 링지화 몰락이 주는 파장은 간단치 않아 새해에도 계속될 전망이다. 링은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의 ‘다미(大秘)’로 불리던 인물이다. 비서실 우두머리로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한다. 국가주석의 모든 일정을 챙기던 그였기에 서방에선 링이 낙마하자 다음 타깃은 ‘혹시 후진타오?’ 같은 억측을 내놓기도 한다. 또는 후의 권력 기반인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이 큰 타격을 받아 공청단 출신인 리커창(李克强) 총리와 차세대 지도자 후춘화(胡春華) 광둥(廣東)성 당서기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다고 전망하는 이도 있다.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분석들이다. 링지화 몰락의 원인은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링의 낙마 이유와 관련해 가장 주목해야 할 건 당 기율검사위원회 소식을 발 빠르게 전해 온 중국 재신망(財新?)의 보도다. 재신망은 ‘링지화와 저우융캉, 그리고 보시라이(薄熙來·전 충칭시 당서기) 사이엔 모종의 동맹관계가 있었다’고 전한다. 링의 몰락을 설명해 주는 가장 핵심적 내용이다. 링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결코 용인할 수 없었던, 즉 시진핑의 권력을 넘봤던 도전 세력인 보시라이·저우융캉 등과 연(緣)을 맺고 있었다는 시사다. 그것도 아주 깊게 말이다.



 링지화와 보시라이의 관계에 대해선 선친 때부터의 인연을 거론하는 이가 있다. 링의 부친 링후예(令狐野)와 보의 부친 보이보(薄一波) 모두 산시(山西)성 출신으로 옌안(延安) 생활을 같이했다. 약초를 알고 서양의학을 배워 의무과장으로 일하기도 한 링후예는 중국 영도들과 가까웠고 보이보와도 친분을 쌓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보이보는 생전 링지화를 챙겼고, 따라서 그가 죽기 전에 링지화가 산시성 출신 고위 관료들로 결성한 시산(西山)회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도록 주선했을 것이란 이야기다.



 보다 확실하게 알려진 건 링지화와 저우융캉의 관계다. 2012년 3월 18일 새벽 베이징에서 과속으로 달리던 페라리 한 대가 교각을 들이받고 부서졌다. 한 남성이 즉사했고 여성 둘이 중상을 입었다. 사망자는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에서 각각 한 글자씩을 취한 링구(令谷)로 링지화의 외아들이었다. 시체를 확인한 링지화가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건 당시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링지화는 새벽에 젊은 여성들을 태우고 고급 외제차를 몰다 사고사한 아들의 이야기가 언론에 알려질 경우 국제적인 조롱거리가 돼 미래가 없다는 판단 아래 사건을 덮으려 했다. 그러나 당시 공안과 사법 계통을 장악한 정법위원회 서기 저우융캉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 링지화는 저우에게 선처를 빌었다. 이를 재신망은 ‘링이 당시 정법 계통 책임자와 모종의 정치적 약정을 맺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링이 저우의 편으로 넘어간 것이다. 훗날 이를 알게 된 후진타오는 링을 내치며 “내 사람이 아니다”라고 진노했다고 한다. 링이 당내 요직인 중앙판공청 주임을 역임하고도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지 못한 배경이다.



 중요한 건 ‘모종의 정치적 약정’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시진핑 정권을 넘어서는 저우융캉-보시라이-링지화 세력 구축으로 해석되고 있다. 일각에선 링이 보시라이 타도에 앞장섰던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 등 중국 일부 영도 일가의 축재 사실을 해외에 흘렸다고 전한다. 돌이켜 보면 시진핑의 친인척이 거대한 부(富)를 쌓았다고 미국 블룸버그 통신이 전한 게 2012년 여름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중요하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하나가 있다. 시진핑에 대한 테러 기도다. 중국 지도부는 여름이면 베이징에서 가까운 휴양지 베이다이허(北戴河)로 가 피서를 겸한 회의를 연다. 바로 베이다이허 회의다. 2012년 여름은 그해 가을 중국 공산당 1인자인 총서기를 뽑는 18차 당 대회가 예정돼 있어 그 어느 해보다 중요했다. 그 베이다이허로 가던 시진핑의 차량 대열을 한 대형 화물차가 덮쳤다고 중국 소식통은 전한다. 시진핑은 다행히 화(禍)를 면했지만 아차 하는 순간 운명을 달리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해 내내 중국 정가에 정변(政變)을 둘러싼 괴담이 떠돌게 된 배경이다.



 과거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는 부패와의 전쟁에 나서며 “100개의 관(棺)을 준비하라. 그중 하나는 내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용기를 과장한 게 아니라 실제 반대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비장함을 담았던 선언이다. 시진핑의 처지가 주룽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개혁을 하려면 기득권이 부당하게 누리던 부패를 척결해야 한다. 기득권의 저항은 결사적이다. 반부패 투쟁이 전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전쟁에서의 패배는 죽음과 직결된다. 부패를 척결하고 개혁의 심화를 이루기 위한 시진핑의 투쟁은 그래서 목숨을 건 전쟁이다.



유상철 중국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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