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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만 믿다 발등 찍혀 … 마케팅·영업 신경 써 일어섰다

중앙일보 2015.01.02 00:40 경제 3면 지면보기
지난달 29일 황문상 대표가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캐릭터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소프트웨어 개발 엔지니어인 그는 기술보증기금에서 빌린 회생자금과 추가자금을 깨끗이 갚았다. 지난해 디자인업체를 인수하면서 디자인과 소프트웨어를 결합한 신사업모델을 구축, 추가로 4억원을 지원받았다. [김경빈 기자]


지난해 등장한 새 유행어에 ‘실신’이란 단어가 있다. 실업 상태로 신용불량자가 돼 이중고를 겪고 있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11년 전 황문상(50) 디자인정글 대표가 그랬다. 대기업을 그만두고 창업했다 실패해 나이 서른아홉에 ‘실신자’가 됐다. 사업을 말아먹는 데 4년, 빚을 정리하는 데 꼬박 10년이 걸렸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은행에서 최우수 등급 고객 대우를 받는다. 신불자에서 1등급까지. 돌이켜보면 그를 죽인 것도, 살린 것도 기술이었다.

실패학 탐구 ③ 신불자서 SW업체로 재기한 황문상씨
휴대폰 인증, 홈네트워크 내세워
계약 쏟아졌지만 돈 안 돌아 포기
재취업 뒤 빚 차근차근 갚아 회생
"투자·개발·생산·매출 선순환 돼야"



 황 대표는 흔히 말하는 ‘벤처 1세대’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LG정보통신에 다니던 그는 촉망받는 엔지니어였다. 결혼 직후인 1999년 캘리포니아 소재 반도체 회사에 해외 취업이 됐다. 출국을 앞두고 친구 셋이 모인 술자리에서 “머지않아 휴대폰이 인증수단이 될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뱉었다. 친구들 눈이 휘둥그래졌다. 한국 휴대폰 시장이 한창 성장가도를 달릴 때였다.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그 해 10월 셋이 회사를 차렸다. “얼떨결에 휩쓸려서” 한 창업이었다.



 휴대폰 인증은 당시 완전히 새로운 영역이었다. 요즘 활발한 실명인증, 성인인증 사업 아이디어를 15년 전에 갖고 있었다. 특허를 준비했다. 하지만 기술이 팔리는 속도보다 돈 떨어지는 속도가 빨랐다. 1년만에 두 친구가 발을 뺐다. 오기가 생겼다. 쌈짓돈까지 털어 재도전에 나섰다. 이번에도 기술이 무기였다. 남은 직원 5명과 개발한 아파트 홈네트워크 시스템이 국제표준기술로 채택됐다. 자그마치 300억원어치 계약서가 쌓였다. 돈 버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 버텨야 할 시간이 너무 길었다. “건설업계는 계약 후 돈이 들어오기까지 3~5년쯤 걸립니다. 연구·개발엔 성공했는데 사업이 뭔지 여전히 몰랐죠.” 손실이 계속되고 재무제표가 나빠지자 투자자들이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또 실패였다.



 황 대표는 2003~2004년을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고 했다. 사업을 접겠다 선언하는 순간 회사에 ‘어깨’들이 들이닥쳤다. “이런 식으로 발뺌한 친구들이 길 가다 사라졌다”는 협박이 이어졌다. 매일 밤을 술로 지새웠다. 극단적 선택 직전에 가족들 얼굴이 떠올랐다. 채무자들을 1년 설득한 끝에 회사 문을 닫았다. 공중분해된 투자금이 20억원. 지하 월셋방과 어린 아들, 빚 4억여원이 남았다. “하루는 갓난애를 업은 아내가 유모차에 난방용 기름을 싣고 왔어요. 돈 몇 푼 아끼겠다고 20분 넘게 찬바람을 뚫고 주유소를 다녀왔는데…. 정신이 퍼뜩 들더군요.”



 신용불량의 늪은 깊었다. 받아주는 회사가 없었다. 취업해도 제 명의로 급여를 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가까스로 후배 회사 연구소장 자리를 얻었다. 버는 돈 8~9할을 빚 갚는 데 쏟아부었다. 그나마 아내가 맞벌이를 해 가능했다. 다행히 회사는 3년만에 삼성전자 1위 협력업체가 됐다. 직원이 15배 늘었고 후배 배려로 성균관대 이동통신 대학원도 다녔다. 취업 5년째 되던 해, 신혼 초 직장생활을 했던 LG에서 사업 제안이 왔다. 그간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신기술을 쟁여 둔 덕분이었다.



 2009년 3월 차린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유믹스는 스마트폰과 TV, 홈네트워크에 들어가는 UI(사용자 환경)를 팔았다. 매달 30만~50만원씩 빚을 갚아온 기술보증기금에서 회생자금 5070만원을 지원해 줘 신용불량 딱지를 뗐다. “사업이 성공하려면 기술가치와 사업화(마케팅·영업) 비중이 2:8이 돼야 합니다. 과거에는 기술이 8이라는 착각에 빠졌었죠.” 마케팅·영업에 집중한 결과 LG전자와 삼성전자 협력업체로 선정됐다. 2013년 31억6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해 말 모든 빚을 다 정리했다. 지난해 11월 디자인포털업체 ‘디자인정글’을 인수합병해 디자인과 소프트웨어를 결합한 신사업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황 대표의 재기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친척·지인에게 빚·보증을 받지 않는다 ▶아무리 어려워도 소액씩 꾸준히 빚을 갚는다 ▶기술을 믿되, 기술에만 올인하지 않는다 등이다. “요즘 스타트업 기업인 상담·강연을 나가보면 100곳 중 99곳은 자기들이 뭘 하고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운 좋게 돈벼락을 맞고 코스닥에 상장했다 도산한 기업이 넘쳐나는 이유죠.” 그는 “기술만 갖고는 절대 안 되고 투자·개발·생산·매출의 선순환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디자인정글은



● 설립 : 2009년3월

● 업종 : 디자인포털 서비스 및 소프트웨어 개발·공급업체

● 본사 : 서울시 강남구

● 주요품목 : 디자인정글(www.jungle.co.kr), 모카엔진(Mocha 2D/3D Engine)

● 매출액 : 2013년 32억, 2014년 40억 (인수합병 후)



글=심새롬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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