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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기억의 미덕과 망각의 미덕

중앙일보 2015.01.02 00:03 종합 30면 지면보기
조강수
사회부문 부장
“망각(忘却)의 미덕(美德)은 존재하는가?”



 지난 세밑 서초동 법조타운에서 일하는 고향 선배 변호사가 술이 좀 취하자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혼잣말인지, 질문인지도 아리송했다.



 ‘다분히 철학적인 이건 뭐지, 화두?’ 적절한 답변을 찾기 위해 기자의 뇌가 순간 가속력을 동원하려는 찰나. “프랑스의 판검사 양성기관인 국립사법관학교의 과거 에세이 시험 문제 중 하나야. 지난해 안대희 전 대법관이 총리 후보가 됐을 때 그가 1982년 검사로서 파견 연수를 가 수료했던 학교로 알려지면서 화제가 됐었지. 프랑스 최고 명문학교야.”



 -존재와 부존재 중 정답은 뭔가.



 “존재한다든 아닌 쪽이든 근거와 논리가 정연하다면 높은 점수를 준다.”



 -이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이 있었나.



 “프랑스혁명(1789년) 직후 시민들은 루이 16세와 귀족들을 줄줄이 단두대에 올려 처형했어. 이후 나폴레옹 통치를 거쳐 왕정 복고로 루이 18세가 등장한다. 혁명기에 왕과 귀족들을 죽인 자들을 찾아내 보복을 할 만도 한데 루이 18세가 특명을 내려서 못하게 했대. 극우왕당파가 보복을 자행한 것과는 별개지만….”



 -법률가들과는 어떤 상관이 있다고?



 “공소시효와 관련 있지.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일정 기간(국내는 25년)이 지나면 처벌하지 않기로 사회적 합의를 한 게 공소시효야. 사건 당사자들의 기억력 감퇴로 인한 진실 규명의 어려움, 피해자와 사회적 감정의 진정에 따른 처벌의 필요성 감소 등이 근거다. 사회적으로 망각의 영역으로 보내야 맞는 사건도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망각이 없다면 생각이 다른 사람들 간의 골은 계속 깊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어?”



 망각의 미덕이 범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지만 일상생활에서도 망각은 지대한 미덕을 발휘한다. 그동안 망각의 덕을 본 게 한두 번이던가. 대학 입시 낙방, 실연의 아픔, 물(낙종) 먹고 꾸지람 듣기 등 모든 스트레스를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아마 괴물들이 생겨날 것이다.



 지난해를 돌이켜보면 세월호 침몰 사고와 사고 유발자들은 집단의 기억 속에 또렷이 각인해야 하지만 ‘정윤회 동향 문건’ 보도로 촉발된 청와대 문건 사태는 빨리 망각의 영역에 유폐시켜야 하지 않나 싶다. 특히 문건 사태는 세월호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대한 의문이 출처 불명의 추잡한 마타도어와 맞물려 증폭됐다. 급기야 내용의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근본 없는 문건에까지 청와대 작성이라는 당의정이 입혀져 유포돼 세상이 한 달씩이나 뒤흔들렸다. 올해는 근본 없고 무례한 허위 주장이나 유령 문건에만 시달리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조강수 사회부문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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