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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연의 시시각각] 복수하다, 베풀다, 관용하다

중앙일보 2015.01.02 00:03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규연
논설위원
‘… 그 정도의 일로 직원들을 혼낼 게 아니라 관용을 베풀 줄 알아야….’



 얼마 전 어느 신문 칼럼에 등장한 문구입니다. ‘관용을 베풀다.’ 비문(非文)은 아니지만 ‘관용은 베푸는 것인가’에 대해 잠시 의문을 가져봤습니다. 다른 사람의 가치나 신념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을 관용(寬容)이라고 한다면 왜 그런 행위를 뒤따르는 동사가 ‘베풀다’가 돼야 할까요?



 제가 근무하는 중앙미디어네트워크는 올해 어젠다로 ‘이젠 시민이다’를 잡았습니다. 지난 한 해 모든 이슈를 삼켜버린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남겼습니다. 정부와 시장이 앞장서는 발전 방식만으로는 한계에 도달했다는 점, 시민 스스로 바뀌지 않으면 한국 사회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신년 어젠다를 가다듬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대목은 ‘시민이란 무엇인가’라는 숙제를 푸는 것이었습니다. 시민, 시민 하는데 각자 생각하는 의미가 백인백색입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고 간단히 정의하면 그만이지만 우리가 쓰는 ‘시민’에는 독특한 시공간적 맥락이 담겨 있습니다. ‘이젠 시민이다’라고 하려면 시민을 탐구해야 했습니다.



 역사적 맥락에서 ‘시민’을 살펴봤습니다. 멀게는 고대 아테네 폴리스에서 시민이 나오더군요. 폴리스가 공동세계에 참여할 때 형성되는 물리적 공간이라면 시민은 노예 등과 달리 그 공동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신분을 가진 폴리스의 구성원입니다. 프랑스 혁명 때도 시민이 나옵니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으면서도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갖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후 수정마르크스주의자들은 시민을 사회운동을 전개하고 지배계급에 견제하는 거점이라고 봤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한 신(新) 시민사회적 관점도 있습니다. 법적 권리와 의무, 견제와 대항뿐만 아니라 자기 책무성을 갖고 대안을 제시하는 존재로 시민을 이해한 겁니다.



 비슷한 단어인 국민·민중·대중과 비교해 시민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시민은 한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성격이 강한 국민보다 더 자발적이고 세계지향적입니다. 또 지배계층에 저항하는 민중보다 능동성이 강한 존재입니다. 획일적인 소비대상인 대중보다 다양하고 공동체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이처럼 시민의 의미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양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 바람직한 시민은 무엇일까요. 어젠다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국내 석학 10명을 인터뷰했습니다. 그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시민의 자격은 네 가지였습니다. 참여·책임·공공선·세계…. 그래서 ‘참여하고 책임지며 공공선을 추구하고 세계를 향하는 존재’라고 시민을 정의했습니다. 신년 기획기사가 나간 뒤 한 언론학자(이호규 동국대 교수)가 전화를 해와 코멘트를 하더군요.



 “시대에 딱 맞는 어젠다다. 시민의 필요성과 다양성을 잘 설명했다. 그런데 더 단순하게 시민의 속성을 표현했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관용….”



 그에 따르면 관용은 서구사회에서 종교적·정치적 대립의 해결사로 등장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가치체계를 받아들여 극한 분열을 막아보려는 취지에서 형성된 개념이라는 겁니다. 이후 다수자·강자가 약자·소수자의 신념이나 가치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다원성을 바탕으로 공동체의 진보를 도모하자는 의미로 그 뜻이 커졌다고 합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보니 관용에는 참여·책임·공공선·세계가 모두 포함돼 있습니다.



 “반드시 복수하겠어.”



 세밑에 터진 폭탄발언이 새해 첫날에도 여전히 유행어 선두에 올라와 있습니다. 참여와 책임, 공공성, 세계성이 결여된 반(反)시민적 언동입니다. ‘이젠 시민이다’의 시민은 적어도 저런 발언은 하지 않는 존재일 겁니다. ‘관용을 베풀다’ 같은 거만함도 드러나지 않는 존재일 겁니다. 이것저것 다 빼고 시민을 표현하면 ‘관용하는 갈대’가 아닐까 합니다.



이규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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