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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이야기가 있는 집 〈28〉 경주 교동 법주집

중앙일보 2015.01.02 00:01 Week& 7면 지면보기
사랑방에 들어가 앉긴 했으나 교동 법주댁 안주인 서정애씨는 취재를 사양했다. “바로 곁에 큰집이 붙어있는데 경주 최부자집 내력은 내가 아닌 주손에게 들어야한다” “법주는 대량생산이 불가능한데 많이 알려지면 도리어 곤란하다”던 그가 어느 순간 마음을 활짝 열었다. 의례적인 통성명을 하던 중 내가 안동 내앞에서 온 ‘내앞 김가’라는 걸 알고나서부터였다. 내앞은 그의 외가! 안동의 떠르르한 명문 학봉종택이 외가라는 말에 나 또한 “그럼 ‘우리아배 참봉나으리’를 쓰신 김후웅 할매의 따님?” 하면서 펄쩍 뛰었다.


최부자집의 작은댁 … 궁중술 300여 년 대이어 빚어

최경·서정애씨 부부와 아들인 홍석씨가 사랑채 툇마루에 앉아 오붓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370년 전 90칸이었던 집은 뜯어 옮기면서 70칸으로, 지금은 40칸으로 줄었다.


그렇다. 딸들이 가문을 잇는다. 아들은 그 자리에 붙박여 가문을 지키지만 딸들은 전혀 예상치 않은 곳으로 이동하여 큰 가문의 안방을 턱 하니 차지하고 핏줄을 이어간다. 안동에서 청송으로, 청송에서 다시 경주로! 김가가 서가를 낳고 서가가 다시 최가를 낳는다. 낳을 뿐 아니라 친정집 향한 그리움을 품은 ‘가슴’을 헤치고 아이를 젖 물려 키운다. 그러면서 ‘친정에서 왔다 하면 날아가는 기러기라도 반겨’ 맞아들인다.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선보기 며칠 전에 꿈을 꿨는데 내가 녹의홍상을 입고 강을 헤엄쳐 건너가더라고요. 그러다 예식장에서 신랑입장 하는 걸 구경하고 있는데 얼굴은 안 보이고 뒷모습만 보여요. 이발을 정갈하게 하고 아주 귀티나게, 반듯하게 생겼더라고요. 선보는 날 신랑이 마주 앉았다가 일어서서 나가는 걸 보니 아하, 꿈에 본 그 뒷모습과 똑같데요.” 한평생 해로하고 살아온 안어른을 만나 서방님이 좋았더냐고 물으면 대개 진저리를 친다. 다음 생엔 만나지 않겠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그런데 서씨는 꿈에 뒷모습을 보고난 후 만나 40년을 살고난 남편을 이렇게 평했다. “평생 곁눈질 한번 안 하고 인격관리 잘한 사람이지요. 말실수 한번 한 적 없고 돈 한 푼 허투루 쓰지 않고 부모님께도 그런 효자가 없고.” 올 봄 98세로 타계하신 시어머니 배영신씨는 처녀 때 치마에 흰 칼을 차고 다녔고(경북여고 출신이란 의미), 초등학교 교사에다 피아노 연주에 능한 신여성이었다. 집안대소사를 맵짜게 챙기면서 음식솜씨가 빼어났기에 누룩을 띄워 찹쌀을 발효하는 가양주 빚는데도 능했다. 평생 한복을 칼날같이 직접 지어 입었고 머리칼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치마를 단정하게 여며 앉아 술독 앞에서 갖은 정성을 들였다. 그러다 1986년 정부가 인증하는 중요무형문화재 교동법주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대문에 들어온 손님이 안채를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막아둔 ‘체면담’. 여름이면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담을 덮는다.
이 집안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서씨의 친정 어머니 김후웅 할머니 얘기부터 먼저! 김후웅은 학봉 13대 종손 김용환의 무남독녀였다. 나중에 독립운동 자료들이 발견되어 아버지 김용환이 95년 건국훈장을 추서 받자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애절한 서간문을 썼던 분이다. 김용환은 안동 일대에서 노름꾼이자 파락호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종가에 대대로 내려오던 전 재산 논밭 700두락 18만 평(현 시가로 300억원이 넘는다)을 노름으로 모조리 탕진했다. 그러나 그건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위장일 뿐이었다. 실은 그 돈은 노름꾼을 위장한 독립군에 의해 모조리 만주에 군자금으로 전달되었다. 그게 김용환 사후에야 밝혀진다. 그 위장은 너무나 철저해 가족들도 끝끝내 아버지를 개차반 노름꾼으로만 알았다. 46년 임종에 이를 때까지도 비밀을 밝히지 않아 무남독녀 김후웅은 오랜 세월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청송 마평 서씨 문중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겨둔 돈, 그 돈마저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 농 신행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무남독녀가 시집갈 때 가져갈 농값까지 독립군 군자금으로 보내버렸던 아버지, 그 따님의 따님이 ‘경주 최부자집’ 작은 댁 며느리가 되어 지금 내 눈앞에 해맑은 얼굴로 앉아있다. 항일의식과 독립정신은 이렇게 핏줄을 타고 연면히 이어진다. 명문가의 자부심이란 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희생의 바탕 위에서만 생겨났다는 것을 오늘의 ‘슈퍼 갑(甲)’들이 명심했으면 좋겠다.



경주 교동 최씨 사랑방에 앉아있노라니 그런 생각이 절로 인다. 다른 사랑방과 달리 머리맡에 책방과 침방이 따로 분리돼 있고 불쑥 튀어나온 횃대도 인상적이다. 문갑과 경상은 일제 강점기, 공예를 전공했다는 서씨의 시아버지 최종씨가 생전에 직접 만든 물건이다. 교동 최씨는 손기술이 좋은 내림이 있나보다. 최경씨도 집에서 쓰는 밥상쯤은 나무 그루터기를 잘라 매끈하게 직접 만들어 쓴다.



바깥에서 대기중인 빈 술독들. 정부의 검정을 받은 장독만 써야하기 때문에 미리 구비해놓고 있다.
교동법주를 만드는 최경씨 집은 12대 만석꾼으로 세계 경영학계에 불가사의를 제공한 경주 최부자집의 작은집이다. 담이 나란히 잇대어 있고 전에는 두 집을 잇는 일각문이 나 있었다. “우리 증조부 만자 선자 어르신이 양자로 들어오셨어. 고조부 때 형제분이 계셨는데 큰집에 아들이 없으니 만자 희자 어르신을 큰집에 보내고 우리는 새로 양자를 들이신게지. 경주 최부자 최부자 하지만 손이 귀해 아들이 하나뿐이라 재물이 지켜졌던 측면도 클 겁니다. 증조부 택호가 물봉인데, 말에 지필묵을 싣고 다니면서 지필묵 없는 집에 몰래 놓아주곤 하셨대요. 쌀 떨어진 집에 쌀 갖다 놓는 건 물론이고. 장사 지낼 때 시장 장사꾼이 다 철시를 할 만큼 인심을 얻으셨지요.”



경주 최씨는 원래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터잡고 살다 250년 전에 교촌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 내남에 있던 집을 뜯어 옮겼다. 원래 90칸 집이었는데 옮기다 보니 70칸으로 줄었다. 살림이 넉넉했기에 형은 새로 옛집만치 큰집을 새로 짓고 헌 집은 동생이 살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국가문화재가 된 경주 최부자 집은 250년이 되었고 최경씨가 살고 있는 집이 내남 시절 120년이 더 보태진 370년 묵은 집이다.



“대문채를 수리하다가 보니 대들보에 숭정 4년이란 연호가 쓰여 있었어요. 서기 연도를 따져보면 1644년이었지요.(최경)” 오랜 가문의 사연은 구구절절하다. 배영신 여사는 맏며느리가 아니었지만 장남이 직장 탓에 객지생활을 하는 바람에 큰 살림을 맡게 됐다. “마지막 왕세자 이강, 스웨덴 황태자, 이시영 부통령, 초대 주미 대사 무초 같은 큰 손들이 줄줄이 최부자집 사랑방에 묵어 갔어요. 그랬으니 솜씨 좋은 작은집 새댁이었던 어머니는 겨울이면 귀한 술인 법주를 여러 독 빚어내야 했죠.”



소박하게 차려낸 교동법주 술상. 교동 법주는 호박색의 빛깔에 달큰한 맛과 향을 지녔다.
법주를 처음 빚은 사람은 최종의 9대조인 최국선. 그는 조선조 숙종 때 임금의 수라상을 감독하는 사옹원의 참봉 벼슬을 지냈다. “사옹원 참봉은 미관말직이지만 임금의 음식 담당이라 사대문 밖 사람은 쓰지도 않고 충신의 자손 아니면 쓰지 않았대요. 우리는 국선 할배의 조부인 최진립 장군이 임란 때 공을 세운 충신이어서 사옹원에서 일할 수 있었답니다. 국선 할배가 은퇴하고 고향에 내려와 궁중에서 빚던 술을 빚기 시작한 게 교동 법주의 시조가 됐지요.” 교동 법주는 곡주 특유의 향긋한 냄새와 혀에 감기는 달큰한 술맛을 내는 효모가 살아있는 술이다. 생효모라 오래 보관하지 못해 대량 유통은 불가능하고 집에서 소량만 빚는다. 교동 최씨 가문 며느리는 대대로 법주 빚는 법을 전수받았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까지 옛 집터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기에 배영신 여사가 법주 기능보유자가 되었고 지금은 아드님 최경씨가 대를 잇고 있다. “원래는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녔어요. 첫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를 홀로 계시게 할 수 없다고 남편이 경주로 내려가자 그래요. 첨에는 싫다고 했더니 굶어 죽이지는 않을 테니 자기만 믿으라고 해요. 남편의 뜻이니 거절할 수도 없고…” 그때부터 서씨가 큰 살림을 이어받았다. 고부는 특별히 사이가 좋았다.



“어머님이 바쁠 때는 늘 웃으며 말씀하셨어요. 경부 최부자집 며느리가 되려면 용꿈을 세 번 꿔야 한다 했느니. 너와 나는 용꿈을 세 번 꿨으니 이리도 바쁜 게지.” 배영신 여사가 교분이 넓어 집엔 손이 끊이지 않았다. 손을 맞는다는 건 음식을 하고 술을 빚는다는 뜻이었지만 집을 정갈하게 가꾸는 일이기도 했다. 300년 묵은 집은 곳곳이 삭아 내렸고 해마다 그걸 보수했다. 지금 교동 법주댁 담벼락의 흙 한 줌 기왓장 하나에도 최경씨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다. “토수에 목수에 전기기술자에 보일러까지 안 해 본 분야가 없어요. 집사람은 충실한 조수였고.”



왕과 문무백관이 즐겼다는 궁중술 교동 법주는 한산 소곡주와 문경 호산춘과 함께 조선의 3대 명주로 꼽힌다. 요즘 대량생산하는 경주법주와는 족보가 전혀 다르다. 집안 우물 곁에 있는 100년 된 구기자 나무가 술맛의 비밀이었다지만 요새는 물이 오염돼 그 우물물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전래의 법주 맛은 여전하고 지금은 최경-서정애씨 아랫대인 홍석·석윤 남매가 가업을 향기롭게 잇고 있다. 뿌리깊고 오래된 것이 가장 새로울 수 있다. 해묵은 진리지만 전통에서 새로움을 찾지 않으면 우리네 삶은 너무 경박해져버린다. 50억년 묵은 빛덩어리가 뿌려주는 청신함으로 2015년이 밝았다. 새해다. 우리들의 오래된 미래, 경이로운 선물, 첫 해가 떴다!



글=김서령 칼럼니스트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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