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양선희의 시시각각] 장그래들이 사는 나라

중앙일보 2014.12.31 00:02 종합 26면 지면보기
양선희
논설위원
지난 주말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었다. 대학 시절에 덮었던, 30년쯤 잊고 지낸 책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오늘은 다소 작위적이더라도 ‘반성과 새로운 각오’를 써야 한다며 반성거리를 생각하던 중이었다. 반성할 일은 너무 많았다. 올해 내내 우리가 직면했던 수많은 적폐(積弊)는 그 자체로 거대한 반성의 장이었다. 한데 다소 뜬금없는 생각 하나가 내내 머리에 맴돌았다. 일, 직업에 대한 것이다.



 일에 대한 강한 의문은 세월호 사고로부터 시작됐다. 사고 직후 ‘어째서 해경 구조대는 승객을 구조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를 칼럼으로 처음 썼을 때 이런 비난을 들었다. “그럼 침몰하는 배에 해경들이 들어가 함께 죽었어야 했는가.” 그건 아니다. 다만 해경이 그순간 승객들을 구하는 게 자신의 직업적 임무라는 것을 알았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무능해 보였을 뿐이다. 이후 관제센터의 나태와 무능, 관피아 논란의 시발점이 된 관과 재계의 유착이 속속 드러났다. 정말 궁금해졌다. 어째서 자신의 직업에 대한 무시와 유린이 이 정도에 이르렀을까.



 노동이 학대당하는 현장은 도처에서 목격됐다. ‘땅콩 회항’이 대표적이다. 비행기 사무장은 땅콩 한 봉지 때문에 오너의 딸인 부사장에게서 인격적 모멸을 당하고 비행기에서 쫓겨났다. 이 사건에 모두가 분노한 건 ‘개념 없는 부사장’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우리 사회엔 ‘갑질’ ‘감정노동자’라는 말이 일상용어가 됐고 많은 기업이 고객을 왕으로, 종업원은 그들에게 봉사하는 하인으로 전락시켰다. 노동자들은 과도한 봉사와 정서적 짓밟힘을 월급의 대가로 지불한다. 노동은 비천해졌다.



 드라마 ‘미생’ 이후 많은 직장인이 계약직 사원 장그래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장그래는 회사를 ‘우리 회사’로 불렀고, 많은 실적과 업적을 쌓았고, 헌신했지만 모두 무시당했다. 계약직이어서다. 한데 현실에선 대기업 부장도 ‘나는 장그래’라고 고백한다. 우리 시대의 직장인들은 회사가 자신의 헌신과 업적을 무시하고, 바둑판의 바둑돌처럼 언제든 던져버릴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노동은 자부심을 잃었다.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던 정부는 계약직 기간을 4년으로 늘리겠다는 ‘묘책’을 제시하고 정규직을 쉽게 해고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해고당한 근로자들은 납득할 수 없다며 엄동설한에 굴뚝 위에서 농성을 벌인다. 노동력은 머릿수 채우기로, 근무는 밥벌이의 기간과 같은 개념으로 전락한 것일까. 한데 생각해 보면 직장인에게 일은 곧 인생이다. 꿈과 계획은 직업과 연결되고, 인생의 쓰고 단맛을 경험하는 곳도 직장이다. 일을 무시하는 건 인생을 짓밟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생각의 언저리에서 ‘소명으로서의 일’을 설파했던 막스 베버가 생각났다. 그는 통계적으로 자본주의의 발달과 프로테스탄티즘이 긴밀히 결부돼 있음을 증명했다. 거대 상공인과 숙련노동자들 중엔 프로테스탄트가 많고 종교혁명이 성공한 도시도 상공업이 발달했던 도시였다고 했다. 자본주의를 발달시킨 기독교인들은 돈에 대한 탐욕이 아닌 금욕주의를 지향했다. 그들에게 일은 소명(calling), 즉 신에게서 부여받은 임무였다. “인간의 일부는 구원받고 나머지는 저주받았다”는 칼뱅의 말에 따라 자신의 구원을 증명하는 길이 직업적 성공이라고 믿었다. 일은 신성했고, 이 정신이 자본주의를 발달시켰다.



 일의 신성성 혹은 소명. 이 말에 자본주의 노동의 흑역사를 들어 비웃을지도 모른다. 나태한 직업인, 멸시당하는 노동, 지향점을 잃은 직장인, 자본과 노동이 대립하는 건 오늘의 적폐다. 그럼에도 이런 적폐를 지는 해에 묻고 새로 밝는 날에는 ‘소명으로서의 직업’이라는 일과 노동에 대한 자본주의의 원시적 가치를 가슴에 담고 싶은 건 작은 기대감이 있어서다. ‘일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면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양선희 논설위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