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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공유하자

중앙일보 2014.12.29 00:41 경제 1면 지면보기
올 6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실패 콘퍼런스(페일콘)’. 미국·싱가포르·일본·호주에서도 매년 페일콘이 열린다. 실패를 경험한 창업자들이 말 그대로 실패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토론하는 자리다. [사진 페일콘]


지난달 28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재도전 콘퍼런스 경연장. ‘혁신적 실패’를 테마로 참가자 10여 명이 창업 실패담을 털어놓았다. 대상은 실패의 전형을 보여준 황순영(55) 한국프레이밍연구소 대표가 차지했다. 외환위기 직후 창업에 나선 그는 얼굴 인식 TV 광고 효과측정 시스템 개발에 나섰지만 돈만 날렸다. 자신이 기술을 몰라 기술자들 말만 믿은 게 실책이었다. 그러나 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운 그는 현재 도용이 불가능한 1회용 비밀번호 생성기 개발에 도전하고 있다.

[송년 기획] 실패학 탐구
창의적 실패는 혁신의 기반
시행착오 분석 돌파구 찾아
BMW '이달의 창의적 실패상'
실리콘밸리 '실패 콘퍼런스'
성공 위한 자산으로 활용



 기업 경영에서 실패는 부정적인 요소다. 실패가 알려지면 기업 평판이 나빠지고 담당 직원은 실패자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한데 극심한 불황이 실패를 보는 시각을 바꿔 놓고 있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오히려 반전의 계기로 삼으려는 흐름이다. 실패 공포증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주요 선진국에선 이미 실패학이 혁신의 기반이 되고 있다. 실패(failure)·실수(mistake)·잘못(error)을 분석해 활용하는 길을 열기 위해서다. 흐름은 크게 두 갈래다. 첫째는 왜 실패했는지를 분석해 재발을 막는 데 초점을 맞춘 사후 분석이다. 과거 실패를 분석하는 경우는 노키아·코닥·모토로라·소니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들 기업은 현재의 성과에 취해 기술 변화의 흐름을 놓쳤다. 이런 경우 활용 측면에서는 가치가 떨어지지만 반면교사의 의미는 크다. 둘째는 비약적 발전을 위해 ‘예상되는 실패’를 미리 예측하는 데 초점을 맞춘 혁신 차원의 실패 연구다. 여기서는 실패 가능성이 있는데도 미리 실패의 크기를 예측한 뒤 도전하는 과정에서 혁신(이노베이션)이나 비약적 발전(브레이크 스루·break through)을 추구할 수 있다.





 창의적 실패에 도전해 기업 경쟁력을 높인 사례는 독일 자동차회사 BMW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1983년 독일 남부 바이에른 지방의 레겐스부르크 공장 건설을 계기로 획기적인 조직문화 개혁작업에 나섰다. 허허벌판에 새로 공장을 짓는 만큼 하드웨어(공장 건설)부터 소프트웨어(일하는 방식)까지 모두 바꿔 생산성을 높여 보자는 취지에서다. 이 업무는 레겐스부르크 공장의 인적자원관리(HRM)를 총괄하는 게르하르트 빌이 주도했다.



 처음에는 직원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이 낸 혁신 아이디어가 실패하면 “왜 공연한 짓을 했느냐”는 조롱과 질타를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실패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기계적인 정밀성을 앞세운 무결점(zero-error) 문화가 지배적인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조직문화가 혁신을 가로막는다고 판단한 빌은 단 두 가지뿐인 행동규범을 만들었다. ①‘누구나 실수해도 좋다. 다만 회사에 (터무니없는) 손상을 입히지는 말자’와 ②‘미리 계산된 리스크(위험)는 허용하자’였다. 창의적인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자는 얘기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레겐스부르크 공장은 90년대 초반 ‘이달의 창의적 실패상(flop of the month)’을 도입했다. 창의적인 도전에 나섰다가 실패한 사원의 경험담을 전 직원에게 공유시킴으로써 실패의 지식화에 나선 것이다. 실패한 이유가 손실이 아니라 혁신 과정에서 불가피한 자산으로 공유되자 혁신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실패가 예상되면 종전에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일들에 도전하면서 경쟁력이 급속도로 강화됐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실패학은 갈수록 주목받고 있다. 버블경제 붕괴 이후 마땅한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산업 전반에 걸쳐 문제점이 속출하자 왜 이렇게 많은 실패가 일어나는지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연구가 진전되면서 실패 지식을 자산화하는 작업도 크게 앞서가고 있다. 아예 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문부과학성은 2005년 ‘실패 지식 활용 연구회’를 발족시키고 산하 과학기술진흥기구(JST)를 통해 ‘실패 지식 데이터 정비사업’에 착수했다. 이를 통해 실패 사례 100개를 뽑았다. 여기에는 자동차·철도·원자력·로켓발사·건설을 비롯한 일본의 대표 산업이 겪어온 실패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실패의 원인·대처·활용방법을 상세하게 기록해 관련 분야에 도전하는 기업이 이를 반면교사로 삼고 같은 실수를 피할 수 있게 했다.



 미국 실리콘밸리는 ‘실패 밸리’라고 할 만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실패를 낳는 곳이다. 그러나 실패 경험이 헛되지 않고 모두 자산화된다. 실리콘밸리는 2008년부터 페일콘(FailCon)으로 불리는 ‘실패 콘퍼런스’를 해마다 연다. 창업자들이 모여 자신의 실패담을 공유하고 “이렇게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나눈다. 회의 모토는 “실패를 껴안고 성공을 만들자”다. 김동원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는 “미국에서 벤처기업이 자금을 확보할 확률이 1%, 자금을 받은 기업이 제품화에 성공할 확률이 1%, 이들 가운데서 나스닥에 상장할 확률이 1%”라며 “결국 수많은 실패 끝에 성공이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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