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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와 사람] 천상에서 유배 온 듯 … 차와 책과 거문고에 묻혀 한평생

중앙선데이 2014.12.28 02:28 407호 26면 지면보기
거문고를 연주하는 선비의 유유자적한 삶을 묘사한 심사정의 ‘고사관폭도’. [간송미술관 소장]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1439~1504)은 문장과 음악에 능통했던 인물로, 차를 즐겼던 풍류객이었다. 23세에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천하의 영재를 선발하는 발영시(拔英試)에서 선발돼 29세에 경연관이 됐고 지평(持平)을 거쳐 성균직강(成均直講)의 자리에 올랐다. 시문에 밝았던 그의 재주가 빛을 발한 것은 1488년 평안도관찰사로 재임했을 때다. 당시 명나라에서 온 사신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을 위한 연회에서 그와 시를 창수(唱酬·시를 서로 주고받음)했던 사신들은 탄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의 문장은 일찍이 조선의 문호였던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영향을 받았는데, 스스로도 일신(日新)과 탁마(琢磨)에 열의를 다했으니 그런 결과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18> 허백당 성현

성현이 지은 『악학궤범』.
항상 꼿꼿한 선비의 자세 잃지 않아
김안국(金安國·1473~1543)은 ‘허백당선생행장(虛白堂先生行狀)’에서 성현의 학문적 태도를 “늘 새벽에 일어나 방 안에 고요히 앉아 책을 곁에 두고 손에서 (책을)놓지 않았다.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일지라도 공부를 그만둔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그의 내공은 “어려서부터 여러 도반들이 거문고를 배웠는데 그만이 (거문고의) 묘법을 얻어 12율(12律·六律은 양(陽)을, 六呂는 음(陰)을 상징)에 능통”했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음악을 아는 이는 성현 한 사람뿐이다”고 평가했으니 이는 그가 후에 『악학궤범』을 찬술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더구나 그는 평생 꼿꼿한 선비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러기에 부귀한 사람을 찾아가는 것조차 꺼렸고, 찾아오는 이에게도 성의를 다해 대접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지위가 육경(六卿)에 이르렀지만 집은 언제나 적막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그는 천상에서 유배 온 천인(天人)이었던가 보다. 속세와 어울리기가 어찌 이리 힘들었을까. “밤이면 달을 보며 거문고를 연주하였고 휘익 나는 듯 생각에 걸림이 없었고 바라보면 마치 신선 같다(夜則對月鼓琴 翛然遐想 望之如神仙中人)”고 한 김안국의 말은 그의 구속되지 않으려던 속내를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신선처럼 삶을 살고자 했던 그에게도 고뇌는 있었던 듯하다. 들고나는 온갖 생각을 다독이려 했던 그의 심회를 ‘독좌(獨坐)’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고요한 집에 홀로 앉아있어도 온갖 생각이 이어지니(獨坐幽軒萬慮嬰)
하얗던 귀밑머리가 더욱 더 희었구나(淸霜入鬢剩添莖)
주렴을 걷고 멀건이 거미줄을 쳐다보고(開簾怕見蜘蛛網)
베개에 의지하여 쓸쓸히 귀뚜라미 소리를 듣노라(欹枕愁聞蟋蟀聲)
섬돌에 비치는 달은 소식이 온 듯하고(明月到陛來有信)
길 가득 맑은 구름, 덧없이 가누나(靑雲滿路去無情)
오직 거문고만이 내 마음을 알기에(知心惟有琴三尺)
괘를 짚어 다시 연주하리(就撫瑤徽鼓再行)
『허백당시집(虛白堂詩集)』 권8

현실에선 늘 고요한 집에 홀로 앉아 있어도 온갖 생각이 이어진다. 부질 없는 생각은 사욕과 명리(名利)에서 나온다. 사욕은 번뇌를 부르고 고통이 따른다. 이미 백발이 성성한 그도 생각의 난마를 끊지 못한 듯. 이런 인간적 고뇌는 그의 인간미를 나타낸 대목이기도 하다. 더구나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 탓에 가슴앓이가 심했던 그에겐 ‘섬돌에 비치는 달’이 다정한 벗으로 다가왔을 것이라 여겨진다. 오직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은 거문고이기에 거문고의 괘를 짚어 연주했던 그의 본의는 무엇이었을까. 전국시대의 종자기(鍾子期)와 백아(伯牙)처럼 서로를 알아주던 지음(知音)을 위한 연주였다면 당시 그의 지음은 분명 텅 빈 대지를 비추고 있는 달일 듯하다. 이 시를 감상하는 후인들은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그 실마리를 찾으려 할 것이다.

현대인에게 졸박한 삶의 가치 일깨워
그는 자신의 호를 허백당(虛白堂)이라 불렀다. 허백(虛白)은 장자(莊子·B.C.369~B.C.289)의 『인간세(人間世)』 편의 ‘허실생백(虛室生白)’에서 연유된 듯하다. 허실(虛室)은 텅 빈 공간이요, 생백(生白)은 인간 본연의 마음이다. 환하게 밝은 마음상태는 고요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맹자(孟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나 주희(朱熹·1130~1200)의 허령불매(虛靈不昧)도 기실은 같은 뜻이다. 따라서 자신의 호를 허백당이라 한 그의 취지는 사욕이 일어나지 않는, 인간 본연의 밝고 환한 마음상태로 살아가길 천명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실로 호연한 마음으로 살고자 했던 그의 일면은 ‘입춘(立春)’이란 시에도 드러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올해에는 추위가 너무 심하여(今年寒更甚)
눈보라마저 산촌을 가리네(風雪暗山村)
어느 곳이 도생의 채마밭이런가(何處桃生菜)
전번(翦旛·왕명을 전달하는 증표)을 보내는 사람조차 없구나(無人送翦旛)
한적한 곳은 자적하기 좋기에(幽居多自適)
명리를 따질 필요가 없네(名利不須論)
사립문 닫고 졸박함을 기르니(養拙衡門下)
고요한 삶, 성가실 일이 없네(生涯靜不煩)
『허백당시집(虛白堂詩集)』 권8

성현은 산수를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집에 있더라도 항상 강호의 풍월을 마음에 품었고, 명산이나 승경지에 대한 풍문을 들으면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늘 강호를 마음에 품었던 삶의 모습은 위진남북조 시대에 종병(宗炳·375~443)의 와유(臥遊)를 닮은 것일까. 와유나 소요(逍遙)를 잃고 외양으로만 치달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사립문 닫고 졸박함을 기르니/ 고요한 삶, 성가실 일이 없네”라고 한 그의 말이 경구처럼 들린다. 더구나 명리(名利)에 따라 이해에 얽혀 사는 현대인의 삶은 난마처럼 얽혀서 여유를 잃은 지 오래다. 졸박(拙朴)함을 회복해야 할 우리에게 그의 시는 큰 울림을 준다.

특히 그는 정치적인 혼란기를 살았던 인물이지만 늘 음다(飮茶)의 소박한 즐거움을 버리지 않았다.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봄날, 군더더기 없는 끽다(喫茶)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행화소영(杏花小詠)’의 내용은 이렇다.

비 오듯 물 끓은 정병에 막 차를 넣었는데(銅甁如雨茗新添)
(책을 잡던) 곤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가 잠이 들었네(手倦支頤黑甜)
짝짝거리는 새 소리에 화들짝 놀라 (낮잠에서) 깨어 보니(啼鳥數聲驚午夢)
살구가지 꽃 그림자, 성긴 발에 가득하다(杏花枝影滿疏簾)
『허백당시집(虛白堂詩集)』 권4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그는 독서광이었음이 분명하다. 나른한 봄날, 그가 차를 달인 연유는 졸음과 무료함을 쫓기 위함이었다. 막 끓어 오른 탕수(湯水)를 빗소리로 표현한 것도 탁월하지만 “턱을 괴고 있다가 잠이 들었네”라는 말은 이 시의 압권이라 하겠다. 차가 우려지는 순간의 적막함과 꿀맛 같은 오수(午睡)를 마주 놓은 그의 시격(詩格)도 고상하지만 그는 진정 차를 즐기는 묘미를 알았던 다인인 듯하다. 순간 시공간의 적막을 깨운 새들의 지저귐. 화들짝 깬 그의 눈앞에 펼쳐진 봄날의 풍경은 선경(仙境)이었다. 차를 즐기는 오묘함을 일미(一味)로 드러낸 이 시는 그의 수준 높은 차의 경지를 제대로 드러낸 시라고 평가할 수 있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에 있는 성현의 묘지.
격조 높은 시로 오묘한 차의 세계 표현
특히 맑은 제천의 강물과 달을 감상하며 지은 ‘제천완월(濟川玩月)’에서 그가 노래한 차의 즐거움은 그 어떤 표현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다. “서풍에 비 그친 뒤 차 싹이 산뜻한데(金風捲雨雲芽靜)/ 달빛은 너울너울 맑은 하늘로 흩어졌네(玉桂婆娑散秋影)”라 하여 맑고 청명한 당시의 정황을 드러냈고, 이런 풍광 앞에서 “정자 앞의 시인은 골수까지 맑아져(亭前騷客骨更淸)/ 차 솥에 용단차를 조금 끓여 마시네(茶鐺小試龍團餠)”라고 하였으니 차를 즐긴 이 더 이상 무엇을 원하랴.

더구나 심신이 맑아진 상태에서 “굽어보니 긴 강물은 천 길 바닥까지 맑고(俯瞰長江千丈徹)/ 내 수염과 머리털은 공중에 흩날리누나(散我空中鬚與髮)”라 했고 “강물에 비친 밝은 달을 마주하니 잠 이루지 못하고(臨流對月耿無眠)/ 느린 뱃노래 잦아들어 중도에서 끊어지네(款乃聲殘不成曲)”라고 표현했다. 이는 분명 밤이 깊었음을 말한다. 행여 그는 제천의 풍광을 감상한 후 작은 절을 찾았던 것은 아닐까. 조선의 시객을 알아본 “마중 나온 산승은 아는 사람처럼 반갑게 인사하고(居僧來揖如相識)/ 차를 따라 권하며 또 시를 청했던(勸我斟茶又索詩)” 것이리라.

이처럼 승려들이 차를 권하며 시를 구했던 정경은 당시 차 문화의 일면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당시에도 차는 문인과 승려들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다. 물론 고려시대의 풍요로운 다사와는 비교할 수 없이 소박해졌지만 차를 즐기려는 원래의 목적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가 쓴 『용재총화』에는 여말선초의 다인(茶人)인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行·1352~1432)이 “충주의 달천수를 제일로 쳤고, 한강의 우중수(牛重水)를 그 다음으로, 속리산 삼타수를 세 번째로 쳤다”고 한 내용을 수록해 두었다. 물을 감별하는 일은 다사(茶事)의 시작이요, 끝이다. 따라서 조선 전기시대에도 차를 즐기는 사람들의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차의 품격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성현의 자는 경숙(磬叔)이고 용재(慵齋), 부휴자(浮休子), 허백당(虛白堂), 국오(菊塢) 등의 호를 썼다. 그는 저서 『허백당집』 『악학궤범』 『용재총화』 외에도 『부휴자담론』 등을 남겼다.



박동춘 철학박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문화융성위원회 전문위원. 저서로는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 『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 『우리시대 동다송』 『추사와 초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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