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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삼킨 북·미 막후 접촉

중앙선데이 2014.12.28 02:46 407호 30면 지면보기
김정은이 암살당하는 내용의 영화 ‘인터뷰’의 예고편이 공개되자마자 북한은 이를 전쟁 행위라며 유엔에 개입을 요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엔 최고 지도자의 명예와 위엄보다 더 중요한 게 없는데, 영화가 그를 조롱했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무슬림 앞에서 코란을 불태운 것과 같은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소니 픽처스의 상영 취소 결정이 테러 위협에 굴복한 실수고, 북한에 비례적 대응을 하겠다고 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발언은 이 사건을 영화 배급의 문제에서 북·미 관계의 현안으로 격상시켰다. 오바마 대통령의 개입은 이해가 가지만 이제 북한과 미국 모두 후퇴할 수 없는 위험한 상황이 됐다. 미국은 오바마 대통령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대응을 공언했고, 북한은 최고 지도자의 존엄이 걸렸기 때문이다.

소니 픽처스는 결국 영화를 일부 상영관과 인터넷을 통해 개봉했다. 9·11 테러와 같은 대응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해커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위협은 비행기를 고층빌딩에 충돌시키겠다는 것은 아닐지라도 사이버 공격보다는 물리적 공격을 암시했다. 물론 북한이 미국 본토에서 물리적 공격을 감행할 정도로 어리석다면 미국은 지금까지의 어떤 대응수단보다 강력한 방법으로 보복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걸 염두에 뒀는지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20일 “영화관의 무고한 구경군(꾼)들을 목표로 한 테로(테러) 공격이 아니다”면서도 “반(反)공화국 적대행위에 책임이 있는 자들과 그 본거지에 대한 정정당당한 보복 공격을 가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폭력 사용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닌 셈이다.

북한이 온갖 말로 미국을 위협한 게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 위협은 북한 최고기구인 국방위원회 명의였다는 점이 이례적이다. 김정은이 개인적으로 오바마 대통령과 레벨을 맞추기 위해 검토하고 용인했다는 뜻이다. 미국에 대한 ‘성전(聖戰)’, 반동적이 아니라 ‘불순한’ 등의 표현도 북한보다는 지하드 단체가 자주 쓰는 단어라는 점에서 생소하다.

이런 가운데 한국의 원자력발전소 가동 시스템이 해킹됐고, 북한의 인터넷망도 다운됐다. 만약 한국 원전 해킹이 북한 소행이라면 북한은 미국이 보복에 나설 경우 어떤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다. 북한 인터넷망이 다운된 것은 북한 스스로 한 일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이 방안의 큰 문제는 1987년 대한항공 858기 폭파 이후 북한이 법률적으로 테러로 해석되는 행위를 자행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미국이 어떤 선택을 하든 북한도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냉전 시대 흔했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대응 사이클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다. 행복하지 않은 결과가 초래될 것 같아 우려스럽다.

북·미 관계가 이렇게 곤두박질친 게 특히 슬픈 건 같은 시기 미국과 쿠바는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쿠바 소식에 침묵했는데 이는 쿠바가 앞으로 북한과의 무기 거래를 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과 쿠바의 관계 개선은 외교적 해법을 강구하는 북한의 일부 엘리트들에게 북한도 미국과 관계 개선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었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는 지난 12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북한을 상대로 막후에서 활발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들이 영화 ‘인터뷰’를 둘러싼 갈등 때문에 수포로 돌아간 것 같아 안타깝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런 슬픈 소식만 되뇌고 있을 순 없다. 물론 평양에선 성탄절이 그저 또 하나의 평상근무일일 뿐이다. 북한 사람들이 성탄절의 유래는 몰라도, 서양의 큰 명절이고 선물을 주고받는 날이란 건 안다. 평양의 외국 대사관에서 일하는 북한 사람들은 우리가 선물을 포장하고 화려한 크리스마스 디너를 준비하는 걸 보곤 큰 관심을 나타내며 ‘이건 뭐냐, 저건 뭐냐’고 질문을 쏟아냈다. 평양의 각국 대사관들은 돌아가면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는데 2007년 루마니아 대사관의 파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루마니아는 독재자 차우셰스쿠 시절 평양에 엄청난 규모의 대사관 건물을 지었다. 민주정부가 들어선 후 확 줄어든 대사관의 직원이 그 큰 건물의 메인홀을 다 장식하고 엄청난 양의 음식을 대접한 것이 놀라웠다. 평양의 성탄절은 서울과 많이 달랐지만 엄청나게 추운 날씨에 경제활동이 적어 맑은 공기, 또 그 덕분에 볼 수 있었던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존 에버라드 전 영국 외교관. 벨라루스ㆍ우루과이 대사 거쳐 2006~2008년 주북한 영국 대사 역임. 전 스탠퍼드대 쇼렌스타인 아태연구센터 팬택 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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