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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연중 소장의 생활 속 발명 이야기 〈8〉 청바지와 미니스커트

온라인 중앙일보 2014.12.28 00:10
골드 러시가 만들어낸 청바지 국경과 세대를 초월한 젊음의 상징 청바지는 1853년에 탄생했다. 발명가는 천막 천 판매업자였던 리바이 스트라우스. 의류 브랜드 리바이스(Levi’s)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천막용 천이라고 천막만 만드나…발상 전환이 청바지 대박 신화로

1829년 독일 남부 바바리아에서 태어난 스트라우스는 10대이던 1847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뉴욕에 건너간다. 당시 뉴욕에서 의류 사업을 하던 형을 돕는 것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24세가 되던 해 새로운 시장창출을 위해 서부 개척시대의 메카였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황금이 많이 나왔다. 금을 캐려고 모여드는 사람들로 골드러시를 이루었고, 그들이 묵는 천막으로 뒤덮여 있었다. 스트라우스가 들고 온 사업 밑천은 당연히 천막 천이었다. 스트라우스는 천막 천과 함께 천막 완제품도 팔았다. 다른 업자에 비해 천을 싸게 구입할 수 있어 이윤을 많이 남길 수 있었는데, 이게 화근이었다. 더 많은 돈을 벌 요량으로 군납용 천막을 대량으로 생산했다가 그만 납품할 길이 막혀버리는 바람에 하루 아침에 부도가 나버린 것이다.



산더미만큼 쌓인 천막은 방치됐고, 빚 독촉은 심해졌다. 직원들도 월급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이었다. 스트라우스는 헐값으로라도 팔아서 밀린 빚과 직원들의 월급만이라도 해결하고 싶었지만 엄청난 양을 한꺼번에 사줄 사람은 좀처럼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광부들의 바지가 쉽게 찢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천막용 천이라고 해서 반드시 천막만 만들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스트라우스는 튼튼한 천막 천으로 바지를 만들어 광부들에게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이 바지의 수요는 엄청나서 말 그대로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고, 스트라우스는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았다.



1860년부터는 천막 천 대신 뻣뻣하지 않은 데님(Denim)이라는 직물로 청바지를 만들었다. 구리 못으로 주머니의 모서리 부분을 단단히 고정한 새로운 작업복을 선보였는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리바이스 청바지 브랜드의 시작이다. 질기고 튼튼한 청바지는 1930년대부터 일반인에게까지 실용성을 인정받아 널리 보급되었고, 미국 서부 영화 주인공이 청바지를 입고 나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유행이 되었다. 특히 영화 ‘이유 없는 반항’에서 제임스 딘이 청바지를 입은 모습을 보고 많은 젊은이들이 이를 흉내 내 입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는 진(Jean)이라고 불리게 되고,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일상복·휴양복으로 널리 입게 된다. 우리나라에 청바지가 들어온 건 청바지 나이 100세가 넘은 1950년대 이후다.



미니스커트로 훈장 받은 퀀트 미니스커트의 역사는 매우 길다. 고대 로마에선 튜닉(tunic)의 일부로 입었고, 군인·검투사와 노예들도 입었다. 중세 유럽에는 갑옷의 허벅지 부분을 가리는 짧은 철갑 치마도 입었다. 오랫동안 미니스커트는 남성의 의상으로, 중세 이후까지 여성스러움과 거리가 멀었다. 1925년 프랑스 디자이너 폴 포와레가 아주 짧은 치마를 선보였다. 당시로선 신체의 은밀한 부위로 여겨졌던 무릎을 드러내 충격을 줬다. 역풍이 거세 폴 포와레의 미니스커트는 빛을 보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공식적으로 미니스커트를 디자인해 대중 속으로 파고 든 사람은 영국의 디자이너 메리 퀀트다. 1934년 영국에서 태어난 퀸트는 런던 골드시미스 예술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남편 알렉산더와 함께 ‘바자’라는 옷 가게를 개업한다. 퀀트는 단순하고 깔끔하며 다소 아동복 같은 의복과 액세서리 등을 선보여 짭짤한 재미를 본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할 퀀트가 아니었다. 좀 더 파격적인 여성 옷을 선보이기로 하고 디자인에 몰두했다. 퀀트는 여성의 신체부위와 더불어 남성 심리까지 분석했다. 당시 영국은 작고 짧은 것이 유행이었다. 퀸트가 아끼는 자동차도 미니쿠퍼였다.



‘그렇다. 아찔하게 짧은 스커트를 만들어 몸매를 자랑하게 하자.’



그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여성이 무릎 위를 노출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퀀트의 생각은 적중했다. 1964년 탄생한 미니스커트는 도덕성을 잘라낸 옷이라는 혹평을 받았지만 불과 몇 개월 만에 영국에서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젊음과 활동성, 참신함에 그 시대의 정신과 어우러져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해괴한 옷으로 국민정서를 해친다며 못마땅해 하던 영국 정부도 입이 딱 벌어지는 인기와 수출고를 인정, 퀀트에게 훈장을 주기로 한다. 퀀트가 1966년 영국왕실에서 수여하는 대영제국훈장을 받으러 버킹엄 궁전에 갔을 때도 미니스커트 차림이었다.



우리나라에 미니스커트를 처음 선보인 사람은 가수 윤복희씨로, 1967년 1월 6일 미국에서 귀국하며 미니스커트를 가져왔다. 그는 몇 개월 뒤 패션쇼에서 미니스커트를 직접 선보였고, 앨범 재킷에도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진을 실어 우리나라에 미니스커트를 알렸다. 미니스커트 열풍에 1973년 경범죄처벌법에 ‘저속한 옷차림’에 대한 규정이 포함됐다. 무릎 위 15cm가 넘으면 단속 대상이었고, 20cm 이상이면 곧바로 즉심에 넘겨졌다. 경찰은 대나무 자를 들고 다니며 단속했고, 단속이 심해질수록 저항 심리도 커져 미니스커트 길이는 점점 더 짧아졌다. 이 조항은 88년 서울 올림픽 이후에 사라졌다.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왕연중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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