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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금요일] 2차 대전 뒤 뉴욕에 맡긴 유럽 금괴 … 다시 대서양 건너 집으로

중앙일보 2014.12.26 01:07 종합 18면 지면보기
“지하금고는 무사하다.”


금의 대이동 시작되나

 2001년 9·11테러로 미국 뉴욕 의 월드트레이드센터 가 무너진 뒤 뉴욕 연방준비은행(연준)은 즉각 이런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맨해튼 리버티 33번지 뉴욕 연준 지하에는 금고가 있다. 땅에서 25m, 해수면에서 15m 낮은 곳에 위치한 지하금고는 견고한 암반층에 둘러싸여 있다. 90t의 철강제(鐵鋼製) 실린더로 이뤄진 입구를 닫으면 완전한 밀폐 상태가 된다. 테러가 발생했기 때문에 지하금고가 멀쩡한지는 중대 사안이다. 당시 금고에는 각국 중앙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등에서 맡긴 약 7000t의 금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 세계 중앙은행 등이 보유한 금의 25%에 해당하는 양이다. 범죄조직이 뉴욕 일대에 폭발물을 설치해 혼란을 야기한 뒤 연준 금고에서 금괴를 훔쳐갔던 영화 ‘다이하드3’는 현실에서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13년2개월이 지난 지난달 21일. 뉴욕 연준 지하금고에서 122t의 금이 없어졌다. 하지만 뉴욕 연준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다. 강도 짓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중앙은행이 맡겼던 금을 암스테르담으로 가져간 것이다. 네덜란드 중앙은행은 그동안 보유한 금(612.5t) 중 51%를 뉴욕 연준에 보관했다.



 네덜란드뿐만 아니다. 뉴욕 연준 지하금고에서 금을 빼겠다고 나선 곳은 많다. 스위스에서는 지난달 30일 해외에 보관된 금을 국내로 가져오자는 법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했다. 부결은 됐지만 금을 환수하자는 국민의 목소리는 아직 높다. 독일 분데스방크도 지난해 1월 해외에 맡겨 둔 금의 일부를 2020년까지 본국으로 옮기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금 보유국(3384.2t)인 독일은 뉴욕 연준(45%)과 분데스방크(31%), 영국은행(13%), 프랑스 중앙은행(11%)에 금을 분산 예치하고 있다. 벨기에와 오스트리아도 금을 환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은 2011년 영국은행에 있던 금을 자국으로 옮겼다.



‘황금의 방’으로 불리는 미국 뉴욕 연방준비은행 지하금고. 여기엔 각국 중앙은행 등에서 맡긴 금이 122개의 방에 보관돼 있다. [사진 뉴욕 연방준비은행]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세계금위원회(WGC)에 따르면 12월 현재 세계 각국이 공식적으로 보유한 금은 3만2139t이다. 정확한 수치는 발표되지 않았지만 상당한 양의 금이 뉴욕 연준과 런던 영국은행에 보관돼 있다. 한국은행도 보유한 금(104.4t)을 모두 영국은행에 맡겼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옮겼던 금은 IMF 출자금으로 사용됐고, 영국은행에 보관된 금은 그 이후 매입한 것이다. 각국의 금이 뉴욕과 런던에 몰리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일단 상품 거래가 활발히 이뤄지는 뉴욕과 런던에 금을 두는 게 거래와 운용에서 편리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도 런던에 있는 금을 타국에 빌려 주고 일부 수익을 얻는다. 비상시에는 스와프(교환)가 용이하다는 점도 고려됐다. 여기에 두 곳은 안전 측면에서 믿을 만하기 때문에 금이 몰린다.



 금을 사고팔 때마다 금괴를 옮기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수송과 안전 문제 때문이다. 중앙은행들은 금을 두기 적당하고 거래가 잘되는 곳을 찾게 됐다. 부상한 곳이 런던과 뉴욕이다. 심지어 독일마저 제2차 세계대전 무렵 소련의 침공 위협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금을 뉴욕 연준에 맡겼다. 특히 1944년 미국·영국 등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이 브레턴우즈체제를 출범시키면서 달러 중심의 금본위제를 채택한 덕에 뉴욕에 쌓이는 금은 늘어갔다. 정점은 73년이었다. 1만2000t의 금이 뉴욕 연준 금고에 쌓였다.



 한 번 뉴욕 연준 금고에 들어간 금을 빼내는 건 더 어려워졌다. 운반 문제 때문이었다. 일부 금을 가져간 나라도 있었지만 이땐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프랑스는 62~66년 뉴욕에서 30억 달러 상당의 금을 실어 갈 때 잠수함을 동원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베트남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달러를 마구 찍는 미국을 믿지 못하고 금을 뺀 것이다. 투자전문가 리아콰트 아메드는 자신의 책 『금융의 제왕』에서 “금괴는 너무 무겁다. 비싼 보험료를 내고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수백 마일씩 옮기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중앙은행들은 원래 금고에 그대로 보관하되 단순히 소유권만 재등록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70년 전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던 금이 다시 ‘집으로’ 향하는 건 왜일까. 경제위기에다 불신이 겹쳐서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확산된 달러화나 파운드화 등에 대한 불신 때문에 뉴욕과 런던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졌다. 포브스는 금의 환류에 대해 “중앙은행 사이의 신뢰 부족에서 야기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실물 경제위기 때마다 급등한 금 값은 ‘금=불변의 통화’라는 믿음을 공고하게 했다. 흘러간 옛사랑에 대한 대중의 그리움이 커지면서 각국에서 금을 되찾아와야 한다는 열망이 자란 것이다.



 자산 동결에 대한 부담도 환수 이유다. 79년 이란에서 미국대사관 인질사태가 발생했을 때 미국에 있던 이란의 금에 대한 동결조치가 취해졌다. 음모론도 금의 환수를 부추겼다. 뉴욕 연준 지하금고에서 금이 사라졌다거나 미국이 금을 임대해 수익을 내고 있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뉴욕 연준이 그동안 보관한 금을 실물이 아닌 서면으로만 확인시켜 주며 의혹을 키운 탓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금 환수는) 다분히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 성격이 강하지만 유럽의 경기 침체와 미국 양적완화 확대에 따른 불안감이 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했다. 금을 되찾아온 네덜란드 중앙은행은 CNBC에 “(금의 환수가) 공공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뉴욕 연준 지하금고 입구에는 ‘금의 유혹에는 이길 수 없다(Gold is irresistible)’는 독일 문호 괴테의 말이 새겨져 있다. 금의 유혹이 중앙은행의 신뢰를 흔드는 것일까. 선택은 그들에게 달렸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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