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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로 태평양 건너 세계 뒤흔들 준비 됐죠

중앙일보 2014.12.26 00:37 종합 22면 지면보기
‘국악 신동’으로 이름을 알렸던 유태평양. 아이큐가 156이다. “머리가 좋은지는 모르겠다. 뭐든지 하나에 푹 빠진다는 점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지금은 ‘판소리 세계화’의 사명에 빠져들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아, 그 꼬마애?’ 유태평양(22)이란 이름에 이런 생각을 했는지. 그랬다면 미안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이 말에 굉장히 섭섭했다”고 했다.

22세 유태평양의 당찬 꿈
유명세 뒤로 하고 남아공 유학
타악기 공부하며 리듬감 익혀
아버지 여의고 음악 열정 돌아와
영친왕 스토리로 판소리 만들 것



 꼬마애로 처음 알려진 것은 맞다. 1998년 토크쇼 ‘주병진의 데이트라인’에 출연했을 때 여섯 살이었다(작은 사진). 통통한 볼을 달싹여 ‘흥보가’를 불렀다. 출연 전 이미 4시간 완창을 했던 꼬마는 곧 ‘국악 신동’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유명해졌다. CF를 찍었고, ‘천재를 기른다’고 광고하는 태교음악 음반에 이름을 빌려줬다.



 그로부터 10년 후 유태평양은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사람들은 내 이름을 들으면 꼬마만 떠올릴까.’ 고등학교 1학년 무렵이다. 6년 전에 시작된 이 생각은 그를 치열함으로 밀어붙였다. 꼬마가 아니라 성인 예술가 유태평양을 만들려는 노력이 시작된 것이다.



 이달 중순께 만난 유태평양은 자신이 더 이상 꼬마가 아닌 이유를 여럿 들이밀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해 본다.



 ◆아프리카에서 컸다=6세 TV 출연 이후 숨 돌릴 틈 없이 무대에 섰다. 한 해 200회쯤이었다. 그런데 돌연 사라졌다. 2004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4년을 공부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북’ 공부였다. 유태평양은 타악기 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다. 해외 공연을 한창 많이 하던 2002년이었다. “인도 공연 중에 길거리에서 북소리를 들었죠. 지나는 말로 ‘한번 배워보고 싶다’ 했는데 그걸 들은 아버지가 아프리카 유학을 준비하셨더라고요.”



 일반 학교를 다니면서 아프리카 타악기인 젬베를 따로 배웠다. 아프리카인들로 구성된 타악기 프로팀에 들어가 활동도 했다. 학교 재즈 밴드에서는 드러머로 활약했다고 한다.



 판소리 공부도 쉬지 않았다. 네 살 때부터 배운 조통달 선생과 해외 통화로 레슨을 했다. “판소리에는 리듬을 가지고 놀아야 하는 부분이 많아요. 특히 자진모리가 그래요. 그런데 아프리카 리듬을 익힌 후에는 이게 쉬워지더라고요.” 아프리카 리듬을 몸에 심고 소리꾼으로서 훌쩍 자랐다는 뜻이다.



 ◆아버지와 이별했다=16세에 귀국했을 땐 여섯 살 시절을 다시 부러워했다. “지금 나이에 옛날 관심을 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몇몇 행사에 초청되긴 했지만, 본격적 소리꾼으로서 불러주는 무대는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를 여의었다. 2010년이었다. “판소리에 한이 맺힌 분이었어요. 정말 좋아했는데 여건상 못하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판소리·산조만 들려줬다고 해요.”



 그래서 유태평양은 기어다니면서부터 냄비 뚜껑으로 꽹과리 흉내를 냈다. 말은 네 살이나 돼서 트였는데, 그 전에 장구채부터 잡았다고 했다. 아버지의 교육이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어떤 행동이든 소리꾼으로서 하라고 하셨어요. 그땐 잔소리 같던 말씀들이 남아 지금 저의 가장 큰 힘이에요.”



 아버지가 떠나고 판소리 열정이 돌아왔다. “한번은 인터넷으로 박동진 선생님 소리를 보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밤을 새운 거에요. 그때 깨달았어요. 이거 진짜 내가 좋아하는 거구나. 판소리 시작하고 처음으로 이렇게 생각한 것 같아요.”



 전북대 한국음악과에 재학 중인 그는 지난 10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4시간 30분 동안 강산제 심청가를 완창했다. 내년엔 더 큰 계획을 가지고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영친왕의 스토리로 새로운 판소리를 만들 생각이다. “지금 80~90% 완성돼 있어요. 이걸 태평양 넘어 들고가는 게 꿈이에요. 아버지가 왜 이름을 태평양으로 지었는지 증명하려고요.”



 6세 꼬마는 지구 건너편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부모의 생각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성장했다는 데 이 이상의 증거가 필요할까. 그러므로 ‘그 꼬마애’는 이제 사라진 것이 맞다.



글=김호정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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