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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꼬리칸’서 고생해도 재미 … 소원 빌러 가니까

중앙일보 2014.12.26 00:04 Week& 2면 지면보기
1 일출시간마다 관광객이 몰려드는 정동진 해변. 지난 20일 아침, 궂은 날씨가 해를 가렸지만 사람들은 바다를 쉬이 떠나지 못했다.


새해 첫 해돋이를 맞이하려는 사람에게, 강원도 강릉의 정동진은 가장 손쉽고도 어려운 상대다. 바다 코앞까지 데려다 주는 기차가 있어 길 헤맬 걱정은 없지만, 너무 알려진 탓에 인파에 시달리기 일쑤다. 물론 인파에 부대끼며 새해를 맞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에게는 몸 고생도 즐거움이다. 지난 20일 밤 기차를 타고 정동진을 향했다. 을미년(乙未年) 새해 첫날 정동진에서 벌어질 대소동을 미리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정동진 해돋이 기차여행 무박 2일 체험기



해를 보러 가는 사람들



2 청량리역~정동진역을 오가는 무궁화호 열차.
지난 20일 토요일 밤, 서울 청량리역에서 정동진행 열차에 올랐다. 12월31일에나 해맞이 여행을 가는 줄 알았는데, 열차 안은 빈 자리가 거의 없었다. 강원도로 가는 마지막 열차는 오후 11시25분 떠나는 무궁화호 열차였다. 기차를 타는 시간만 장장 5시간에 달했다.



정동진은 두말할 것 없는 해돋이 기차여행 제일의 명소다. 울산 간절곶이나, 포항 호미곶, 부산 해운대도 일출 명소이지만, 기차여행 명소라 부르기는 어색하다. 기차에서 내려 다시 차편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 정동진은 기차에서 내리면 곧장 동해 바다가 펼쳐진다. 그 많은 이들이 밤새 흔들리는 기차에 몸을 맡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기차 안의 표정은 각양각색이었다. 이어폰을 나눠 끼고 밤의 낭만을 즐기는 연인, 술판을 벌이는 중년 무리도 보였다. 열차카페에선 밤새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도시락·음료수·맥주 등 없는 게 없었다. 열차카페 안에 설치된 노래방도 쉴 틈 없이 돌아갔다. 열차카페는 좌석을 구하지 못한 입석 탑승객까지 모여든 탓에 꽤 혼잡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자리를 깔고 앉은 모양이 꼭 영화 ‘설국열차’의 꼬리칸 풍경 같기도 했다. 그래도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꼬리칸이나 특실이나 해돋이를 향한 낭만의 크기가 다를 리 없었다.



객실에서 만난 장정현(28)씨는 해맞이를 하러 정동진에 세 번째 가는 길이라고 했다. “정동진이 멀긴 해도, 기차를 타는 건 즐거워요. 열차 안의 피로야 정동진 바다와 일출을 보면 싹 달아나니까, 고생도 결국 재미예요.”



오전 4시28분 정동진에 도착했다. 일출 시각이 7시26분이니 아직 3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대합실에서 쪽잠을 청하는 사람, 숙소부터 찾는 사람, 전망 좋은 카페로 발을 옮기는 사람, 덕지덕지 온몸에 핫팩을 붙이며 전의를 불태우는 사람 등 시간을 보내는 방법도 제각각이었다.



오전 7시38분. 예정된 일출 시각이 되자, 500여 명이 해변으로 몰려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동쪽 먼바다를 향했다. 하나 구름에 가려 해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날이 밝았지만, 몇몇은 수평선에 던져둔 시선을 차마 거둬들이지 못했다. 부둥켜 안은 젊은 연인은 서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해가 없는 아침 바다는 쓸쓸했다.



새해 첫날 정동진에서 생기는 일



3 오전 4시28분. 관광객으로 장사진을 이룬 정동진역. 4 정동진 해변은 사진 애호가들의 자리 경쟁이 치열하다. 5 겨울 바다는 춥다. 담요를 두르고 해를 기다리는 관광객.
1월1일 아침 정동진은 여행지가 아니라 전쟁터가 된다. 이날 아침에만 정동진에는 10만 명에 가까운 인파가 몰린다. 평소 주말의 백 배가 되는 인파다. 전국에서 몰려든 관광 버스와 승용차로 주차장은 넘치고, 도로는 마비가 된다. 자동차가 드나들 방법이 없어 일부 숙박업소는 차를 가져오지 않는 손님만 받는다.



새해 첫날의 깜짝 교통체증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기차가 유일하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해 예매를 서둘러야 한다. 오죽하면 명절 귀성열차 표보다 새해 첫날 정동진행 기차표 구하기가 어렵다는 말이 나올까. 매년 임시열차를 추가 동원하지만 표는 순식간에 동난다. 지난 1월1일에는 열차 18대가 정동진역으로 들어왔다. 오전 4시30분쯤부터 해 뜨기 직전인 7시 무렵까지 기차는 약 20분 간격으로 정동진역에 사람을 부려놓는다. 이 두세 시간 동안에만 약 4000명이 기차에서 내린다. 하여 역무원도 비상상태에 돌입한다. 정동진역은 원래 10명이 근무하지만, 새해 첫날은 인근 기차역의 도움을 받아 30명 가까운 인력이 투입된다.



일출 전까지 인근 카페와 식당은 만원이 되고, 노점도 극성을 부린다. 어묵 따위를 작은 그릇에 담아 5000원까지 부풀려 판다. 그래도 없어서 못 판다. 정동진역 인근의 숙박시설 50여 개도 특수를 누린다. 평소 4만~5만원 하던 방값이 세 배 이상 뛴다. 바다 보이는 전망 좋은 방은 여기에 2만~3만원 더 얹어줘야 한다.



해가 뜨면 이 어마어마한 촌극도 막을 내린다. 바다와 해가 겹쳐지는 일출의 순간은 찰나와 같다. 이리저리 치이며 보낸 밤샘 시간을 생각하면 보상 시간은 짧아도 너무 짧다. 매일 뜨는 해를 보러 굳이 이 고생을 자처할 필요가 있을까? 2000년부터 해마다 정동진에서 새해를 맞고 있다는 기차여행 전문가 박준규(39)씨가 오해를 풀어줬다.



“구름에 가려 해가 제대로 보이지 않으면, 몸 고생한 것보다 더 억울해요. 해가 지고 뜨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사람도 해를 간절히 바라게 되죠. 1년 묵은 때 벗기고, 소원을 비는 데 이 정도도 고생이라고 할 수 있나요?”



글·사진=백종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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