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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연의 시시각각] 대한항공, 창업 때를 돌아보라

중앙일보 2014.12.26 00:03 종합 34면 지면보기
이규연
논설위원
결국 조현아씨에 대해 검찰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습니다. ‘땅콩 회항’ 사건이 발생한 지 21일 만입니다. 국토부 조사관도 조씨를 비호한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처음에는 사건이 이 정도의 대형 이슈로 커질지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오너 일가의 갑질’이라는 부도덕한 문제에서 폭행·증거인멸·국제법 위반이라는 형사범죄, 나아가 칼피아(대한항공 마피아)라는 구조적 사건으로 무럭무럭 커지는 상황입니다. 국회 일각에서는 ‘갑질 방지법’까지 거론되고 있습니다.



 지탄 대상 역시 확대되고 있습니다. 조현아씨에서 오너 일가, 회사 임원, 회사 전체로 비난의 화살이 차례로 옮겨가는 상황입니다. 사람들은 조씨 일가와 회사가 행한 과거의 ‘갑질’을 용케 찾아내 맹공을 가합니다. ‘과거 사냥’은 어디까지 갈까요? 이왕 과거로 간 김에 확실히 거슬러 올라갈까 합니다.



 광복 직후 미 군정 때의 일입니다. 미군에게 물품을 실어다 주는 조그만 운수업을 하는 청년사업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트럭회사에서 빌린 차량의 운전기사가 미군에게 전달해야 할 겨울파카 1300벌을 남대문시장에 팔아넘기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트럭기사가 청년 회사 소속이 아니고 서류상으로도 미군에게 인수된 것으로 처리돼 있어 청년이 법적 책임을 질 사안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청년은 남대문시장을 돌아다니며 빼돌려진 파카를 이문(利文)까지 보태 회수한 뒤 미군에게 고스란히 갖다 주었습니다. 청년은 당장 큰 손해를 봤습니다. 하지만 더 큰 이문을 챙겼습니다. 바로 신뢰였습니다.



 이후 미군의 평판을 바탕으로 청년의 사업은 승승장구합니다. 그가 바로 한진그룹·대한항공 창업주 조중훈(2002년 작고)이었습니다. 그의 신조는 ‘뚜벅뚜벅 걸어야 경쟁에서 이긴다’(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 43쪽)입니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기보다 미래비전을 가져야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의 다른 신조는 ‘각삭지도 비막여대 목막여소’(刻削之道 鼻莫如大 目莫如小)입니다. 얼굴을 조각할 때 처음에 코는 크고 눈은 작게 새겨놓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눈을 크게, 코를 작게 해놓으면 되돌릴 수 없으니 순리와 절차에 맞게 일을 처리하라는 한비자(韓非子)의 가르침입니다.



 ‘뚜벅이 정신’은 육로운송에서 해운산업, 항공산업으로 사업을 넓혀나가는 과정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1969년, 대한항공 전신인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할 때 일입니다.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적자(27억원)에 시달리던 국영기업을 과감하게 사들입니다. 경영 상태만 보면 무모한 선택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도 있었지만 한국의 성장 추세로 보아 머지않아 항공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중장기 안목에 따라 단기 손실을 감수한 겁니다.



 대한항공과 한진그룹은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글로벌 경기 침체와 고유가 행진으로 항공·해운 사업은 한동안 휘청거렸습니다. 최근 저유가와 미국 경제의 부활로 숨을 돌릴 순간에 ‘오너 리스크’가 찾아왔습니다. 그 위기는 이전보다 더 심각합니다. 신뢰와 도덕의 파탄에서 비롯됐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오너 일가와 임원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동안 직원과 사회에 어떤 신뢰를 쌓았는가? “뻔뻔하고 부도덕하다”는 비난 앞에 내밀 반증의 카드는 있는가?



 “한진(韓進)은 한민족의 전진을 의미하는데, 한국의 진보를 위해서 노력하겠다는 의미다.” 조중훈 회장이 자서전(16쪽)에서 밝힌 창업의 포부입니다. 대한항공의 오너와 임원은 사사(社史)를 펼쳐봐야 합니다.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날 비법이 나와 있습니다. 신뢰와 순리라는 ‘뚜벅이’ 창업정신입니다. 조각할 때 코를 크게 눈을 작게 하는 정신으로, 눈앞에 급급하지 않고 운송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으로 오만과 타성의 얼룩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지워가야 합니다.



이규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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