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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kg 등짐 진 소녀는 3000m 산도 거뜬히 넘었다

온라인 중앙일보 2014.12.26 00:01
히말라야에서 소녀 짐꾼은 처음이었다. 구마리(오른쪽)와 산티는 사내 짐꾼들과 똑같이 25㎏의 짐을 나눠 짊어졌다.


네팔 고산족은 강인하다. 히말라야라는 척박한 환경이 이들에게 이기적 유전자를 배양했을 것이다. 남녀노소 다 그렇다. 그들 중에서도 2010년 만났던 작은 체구의 소녀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지난 2010년 3월 네팔 동부 얄룽 빙하에 우뚝 솟은 자누(7711m) 동벽, 원정대를 따라 칸첸중가(8686m) 지역으로 들어갔을 때다. 트레킹이 시작되는 작은 마을 타르푸(1000m)에서 소녀를 처음 만났다. 이름은 구마리. 네팔의 세 번째 카스트에 해당하는 림부족 아이였다. 체구도 작고 앳돼 보였지만 무릎까지 걷어올린 얇은 면바지 아래로 군살 하나 없는 장딴지가 도드라져 있었다. 째진 눈과 굳게 다문 입술은히말라야의 설표(雪豹, 회색표범)처럼 강인해 보였다.

[김영주 기자의 히말라야 사람들] ① 칸첸중가의 소녀 짐꾼



처음엔 외지인을 구경하러 나온 동네 아이인 줄 알았다. 원정대가 카라반이 시작되는 마을에 도착하면, ‘사다’라고 불리는 짐꾼 우두머리가 짐을 무게 25kg에 맞춰 나눈 뒤 현지인들에게 하나씩 배분한다.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구마리가 앞으로 나섰다. 구마리에게 할당된 짐은 스무 판 남짓한 계란 꾸러미로 40개가 넘는 짐 중에서 가장 컸다. 철망에 차곡차곡 쌓은 계란판은 족히 25kg은 될 성 싶었다.



 소녀 짐꾼을 처음 접하는지라 원정대도 당황했다. 사다 린제이는 “올해 원정대가 많이 들어와 성인 남자는 이미 산으로 떠나고 없어 어쩔 수 없이 고용했다”고 말했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딱딱한 철망에 소녀의 등이 쓸릴 것이 염려돼 매트리스를 덧대어 주는 정도였다. 처음엔 그것도 손사래를 쳤다. 사춘기 소녀의 눈은 경계심이 가득했는데, 원정대뿐만 아니라 한 동네의 짐꾼하고도 거리를 뒀다.



칸첸중가의 또래 아이들과 함께 선 구마리와 산티.
 구마리는 원정대 짐꾼이 처음이었다. 3000m 이상 고산지대를 가본 적도 없다고 했다. 당연히 고소(高所) 증세를 알 리가 없었다. 구마리 옆에 여자아이가 한 명 더 있었다. 산티(17)는 다부진 체격에 큰 콧구멍, 툭 불거진 입술의 전형적인 림부족 처녀였다. 그는 칸첸중가 베이스캠프를 몇 차례 가 봤다고 했다. 구마리는 친구의 권유로 험한 여행을 택한 것이었다.



 이들에게 원정대 짐을 나르는 일은 현금을 만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다. 일당이 1000루피(1만5000원) 남짓으로 다른 품팔이보다 몇 배 많다. 칸첸중가 지역은 닥나무가 많은데, 마른 닥나무 껍질 10kg이 250루피에 거래되고 있었다. 250루피는 성인 남자가 하루를 일해야 버는 돈이다.



 카라반 첫날 구마리는 누구보다 일찍 야영지에 도착했다. 다가가서 말을 걸 었다.



 “몇 살이니?”



 “열다섯.”



 “학교는 안 가?”



 “학교에 다녀. 하지만 돈이 필요해. 집에 가족이 있어.”



한참을 뜸들이다 겨우 몇 마디 토해 냈다. 그리고는 산티와 함께 어디론가 급히 사라졌다. 야영지에서 올려다 보이는 계단식 밭 어딘가에 그의 집이 있다고 다른 짐꾼이 알려 줬다. 그는 선금을 받아 시장에서 산 선물을 가족에게 건네주려고 부리나케 집으로 뛰어갔던 것이다.



 둘째 날 행선지는 케방(1600m)이었다. 구마리와 산티는 뻘뻘 땀을 흘리며 자신의 몸만한 짐을 져 날랐다. 일행보다 후미에서 따라왔지만 힘든 내색은 없었다. 케방은 경찰서와 고등학교도 있고 여행자 숙소 로지가 10개 이상 밀집한 큰 마을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칸첸중가 지역의 12학년(고3) 학생이 대입 시험을 앞둔 날이었다. 수험생과 학부모, 인솔 교사들로 로지가 혼잡했다. 산티와 구마리가 우리 일행 중 가장 늦게 로지에 도착했을 때, 로지를 가득 메운 모두의 시선이 두 소녀에게 쏠렸다. 다부진 아이들이었지만, 이 때만큼은 수줍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낯선 사내들과 한 무리에 섞여 짐을 나르는 일을 또래 아이들에게 보이는 일은 분명 창피했을 것이다. 둘은 짐을 내려놓자마자 사라졌다. 그리고 평소 외양간으로 쓰이는 짐꾼 숙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50명이 넘는 사내들 틈바구니에서 두 소녀는 늘 씩씩했다. 산양처럼 가냘픈 다리로 계곡을 뛰어넘었고 너덜 지대를 지났고 3000m 높이 산도 거뜬히 넘었다. 야영지에 도착하면 땔나무를 구해 왔고, 불을 피워 밥을 짓는 일도 능수능란했다. 깨끗한 계곡이 보일 때마다 세수를 하고 빨래를 해 새 옷으로 갈아입는 등 사춘기 소녀로서의 모습도 잃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일행은 두 소녀에게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을 만난 지 1주일. 이별의 시간이 왔다. 구마리와 산티를 비롯해 경험이 부족한 짐꾼을 체람(3800m)에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나이가 어려서인지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금세 신이 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일행은 그들과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웠다. 우리는 각자 갖고 있던 물건을 하나씩 아이들에게 건넸다. 고산에서 구하기 힘든 헤드랜턴, 우모 양말, 우모 모자 등이었다. 나는 나중에 여자 친구에게 책을 만들어 줄 요량으로 가져온 스케치북 두 권 중 한 권과 독일제 칼라펜 한 다스를 구마리에게 줬다. 학교에서 충분히 자랑할 만한 물건일 것이다. 구마리는 가장 마음에 드는 색깔의 펜을 집어 새하얀 스케치북 표지에 ‘Khumari Limbu’라고 썼다. ‘나도 영어 이름 정도는 쓸 줄 안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2년 뒤 칸첸중가 지역에 다시 갈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구마리를 만나지는 못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름과 생김새를 설명하며 구마리를 찾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특유의 째진 눈으로 말없이 응수하던 구마리의 고양이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김영주 기자 humanest@joongang.co.kr



‘김영주 기자의 히말라야에서 만난 사람’은 김영주 일간스포츠 기자가 히말라야에서 마주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김영주 기자는 지난해 6월부터 해발 8000m가 넘는 히말라야의 14개 봉우리의 베이스캠프를 차례로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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