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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 전 하얀 패션 뉴욕을 물들이다

중앙선데이 2014.12.20 00:16 406호 8면 지면보기
새로 문 연 발렌티노 뉴욕 플래그십 매장. 8층 높이의 수직 파사드로 외관을 꾸미고, 내부는 회색빛 대리석과 나무 등으로 절제된 분위기를 유도했다.
패션사의 한 토막을 소개한다. 때는 1968년. 자신의 이름을 따 브랜드를 만든 발렌티노 가라바니(Valentino Garavani·82)의 패션쇼는 일대 ‘사건’이었다. 모든 옷이 흰색 또는 아이보리색으로 이루어진 ‘스필라타 비앙카(Sfilata Bianca 화이트 컬렉션)’는 ‘색채 혁명’이라고까지 불렸다. 발렌티노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전환점이기도 했다.

발렌티노 ‘전통의 현대화’ 현장 르포

그 뒤에는 뮤즈가 있었다. 미국의 퍼스트레이디이자 당대 트렌드 세터였던 재클린 케네디였다. 60년대 초 우연히 발렌티노를 알게 된 재클린은 이탈리아로부터 드레스를 공수해 입으며 디자이너와 인연을 맺었다. 62년 발렌티노가 선보인 12벌의 ‘살라 비앙카(Sala Bianca, 하얀 방) ‘ 컬렉션 역시 재클린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든 것이었다. 재클린은 미국 사회에서 발렌티노의 홍보대사를 자처했다. 68년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결혼식에서도 발렌티노의 흰색 드레스를 선택했다. 당시 레이스를 단 보디스(드레스 위에 입는 여성용 조끼)와 하늘하늘한 스커트는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도시와 패션, 뮤즈가 하나로 엮였던 일화는 46년이 지난 올해 다시금 ‘소환’됐다. 발렌티노가 9~10일 선보인 ‘살라 비앙카 945’ 프로젝트에서다. 브랜드 측은 뉴욕 맨해튼 5번가에 플래그십 매장 오픈을 계기로 미국을, 아니 뉴욕을 불러들였다. 그때를 재현하는 오트 쿠튀르 패션쇼를 여는 동시에 도시를 상징하는 캡슐 컬렉션(소규모 컬렉션)을 만들고, 아티스트와 컬래버레이션까지 마련했다. 브랜드마다 너도나도 ‘전통의 현대화’를 부르짖는 요즘, 보란듯이 정답을 내놓았다고나 할까. 발렌티노 판 ‘응답하라 1968’, 그 현장에 중앙SUNDAY S매거진이 다녀왔다.

10일 열린 ‘살라 비앙카 945’ 오트 쿠튀르 패션쇼. 흰색과 아이보리색만으로도 다양한 변주를 이뤄낸 의상들이 등장했다.
재키 오나시스가 입던 화이트 컬렉션에서 영감
이번 뉴욕 프로젝트명을 ‘살라 비앙카 945’로 붙인 이유를 뒤늦게 알았다. 10일 오트 쿠튀르 패션쇼가 열린 곳의 주소가 ‘매디슨 애비뉴 945’. 바로 48년간 휘트니 미술관으로 이용됐던 건물이었다(미술관은 내년 5월 맨해튼 미트패킹 지역으로 확장 이전한다). 이곳은 워낙 뉴욕의 명소이기도 하지만, 66년 재클린 케네디가 개관식 리본 커팅에도 참여했다는 인연으로 발렌티노가 대관을 위해 공을 들였다고 한다. 이날 건물의 다른 층에서는 발렌티노와 이탈리아 디자이너 포르나체티가 협업한 작품들이 전시되기도 했다.

패션쇼에는 각국에서 온 기자들과 VIP, 패션계 종사자 등 550여 명이 모여 북적댔다. 배우 케이티 홈스, 소피아 코폴라 감독 등 문화계 인사는 물론이고 데렉 렘, 토미힐피거, 캘빈 클라인 등 미국 디자이너들도 맨 앞줄에 자리했다. 미국 보그 편집장인 안나 윈투어와 이탈리아 보그 편집장 프랑카 소차니의 등장은 패션쇼의 무게를 더해줬다.

드디어 런웨이에 불이 켜졌다. 케이프·A라인 미니드레스 같은 발렌티노의 시그너처가 등장하는 가운데, 군더더기 없는 코트와 목이 올라오는 튤 블라우스는 68년 컬렉션의 디자인을 새삼 복기시켰다. 이어 꽃자수가 박힌 오간자 가운, 각기 다른 패턴의 레이스가 조화를 이룬 드레스가 줄줄이 등장했다. 비치는 소재 때문에 노출이 심한 의상인데도 섬세한 장식들에 더 눈길이 갔다. 과거 컬렉션보다 디자인은 과감해졌지만 오트 쿠튀르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장인 기술은 그대로 유지됐다. 쇼 직전 인터뷰에서 “화이트는 완벽하지 않다면 재앙이 되는 색깔”이라 했던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엘파올로 피촐리의 말이 다시금 실감났다. 그 정성 때문인지 47벌의 옷에는 하나하나 별칭이 주어졌다. 모슬린 레이스 드레스에 캐시미어 케이프 코트를 입힌 차림에는 ‘재키 O’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피날레는 위트 있게 마무리됐다. 장식 하나 없는 아이보리색 캐시미어 드레스. 하지만 뒷모습에 반전이 숨어 있었다. 옷 뒤에는 팝아트적인 문구가 새겨졌다. ‘Love NY’. 이 행사의 의미와 목적이 한 마디로 정리됐다.

뉴욕 연상시키는 빨간 하트로 한정판 디자인
“건물도 이번 쇼의 일부다.” 뉴욕 5번가 발렌티노 뉴욕 매장을 들어섰을 때, 피촐리의 말이 떠올랐다. 첫 인상은 ‘절제’ 와 ‘모던’ 그 자체였다. 8층 높이의 수직 파사드로 완성된 외관은 화려하기보다 날렵하고 투명했다. 내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테라조(대리석에 백색 시멘트를 혼합한 인조석) 외벽에 무광택의 황동과 오크나무로 선반을 배치해 어느 하나가 튀어보이지 않았다. 흔한 샹들리에 하나 없이, 높이 달린 간접 조명 사이사이로 선명한 흰 색 조명이 제품을 비췄다. 하나하나가 런던 출신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손 댄 흔적이라는 게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는 ‘Less is More(덜한 것이 더한 것이다)’라는 신조를 내걸고 인공적 장식을 줄여 작업하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미니멀한 인테리어와 공간에 여유를 둔 제품 배치는 매장을 잠시 갤러리로 변신시켰다. 특히 1층부터 3층까지 이어지는 벽이 압권이었다. 39개 나무 선반을 일정 간격으로 설치한 벽. 그 위에 운동화·클러치·파우치·백팩 등을 올려놓았다. 이번 매장 오픈을 기념해 뉴욕에서만 판매하는 한정판 캡슐 컬렉션이었다.

한데 그 모양새가 마치 설치미술처럼 느껴졌다. 제품들 역시 건물만큼이나 통일성을 갖췄기 때문이었다. 종류는 각기 다르지만 흰색을 바탕으로 빨간 하트를 박은 디자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에 대한 설명이 이내 발렌티노 담당자로부터 들려왔다. “뉴욕에 오면 누구나 보는 게 있죠. I love NY이라는 문구에 있는 기념품요. 그 빨간 하트가 생각나지 않나요?” 크리스마스를 앞둔 뉴욕 거리와도 그 빨간색이 묘하게 어우러졌다.


뉴욕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발렌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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