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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악한 환경 딛고 명문대 합격한 학생들

중앙일보 2014.12.20 01:03 종합 24면 지면보기
# “서울대생이 된다는 게 아직 실감이 안 나네요. 설레고 흥분되지만 국가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지, 혼자 생활비를 벌며 서울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도 큽니다.”


공부방 없어도, 부모 여의어도 우뚝 … '학업탄력성' 남달랐다
집중력 뛰어나고 긍정적 마인드
경제력 하위 25%인데 좋은 성적

 전남 여수고 3학년 박두선(18)군은 지난달 서울대 바이오시스템소재학부 수시전형에 합격했다. 그는 19일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허름한 셋집에 공부할 공간이 마땅치 않아 중학교 때까지 방과후 지역아동센터에서 공부를 했다. 고교생이 된 후엔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는데, 주로 교과서를 반복해 읽었다. 박군의 가족은 일용직 노동자인 아버지와 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 지적 장애를 앓고 있는 누나와 고교에 다니는 여동생이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 형편이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박군에겐 반대였다. 그는 “나를 응원해 주는 가족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더 열심히,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군은 동식물의 생물학적 특성을 분석해 의료기구 등을 만드는 생체모방공학자가 되는 게 꿈이다.



 # “학교는 누구나 다니는 곳이지만 제겐 배우고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라 더 소중했습니다. 경쟁에 지친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교사가 되고 싶어요.”



 강원도 영월 폐광촌에 사는 박혜현(18·마차고 3)양도 올해 서울대 사회과학계열과 대구교대 수시전형에 복수 합격했다. 경제적 이유로 부모와 헤어져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위탁가정에서 자랐지만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은 누구보다 컸다. 시골길을 한참 달려야 나오는 고교는 전교생이 53명이었다. 박양은 “학교가 작아 모르는 게 있으면 바로 선생님에게 달려가 여쭐 수 있어 좋았다”며 웃었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 서울대를 포기하고 대구교대에 입학할 예정이다.





 최악의 환경 속에서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학생들의 동력은 뭘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제시하는 해답은 ‘학업탄력성’이란 개념이다.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학업에 열중하는 집중력과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OECD는 이를 측정하기 위해 부모의 경제·사회적 여건이 하위 25%에 해당하는데도 같은 조건의 학생들보다 훨씬 뛰어난 학업 성취를 이뤄내는 학생들을 분석했다.



 지난해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성적을 기준으로 학업탄력성이 뛰어난 학생들의 비율을 조사했더니 한국은 OECD 평균(7.66%)을 크게 뛰어넘으며 66개국 중 3위(14.04%)를 기록했다. ‘공부 근육’이 튼튼한 학생이 많은 국가로 꼽힌 것이다. 박현정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아무리 가난해도 자식 공부만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부모들의 인식이 유럽이나 미국보다 한국에서 유독 강한 게 원인으로 보인다”며 “과도한 교육열이 사회적으로 문제이긴 하지만 취약계층엔 여전히 보호막인 셈”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최근 한국교육개발원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학업탄력성이 뛰어난 학생들의 특성을 분석했다. 2005년 중학교 1학년이었던 학생 6900명의 사회·경제적 형편과 성적·학교생활 등을 2012년까지 추적 조사했다. 그 결과 학업탄력성이 높은 학생들은 우선 학업을 통해 꿈을 이루겠다는 목표 의식이 뚜렷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3년 전 무릎 부상으로 의사에게서 축구를 그만두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올해 서울대 체육교육학과에 합격한 이요한(18·경기 광문고 3)군이 그런 경우다. 그는 “운동하는 애들은 공부를 안 한다는 편견을 깨고 싶었다”며 “어려운 환경에 처한 학생들을 돕는 교사나 카운슬러를 하고 싶은 꿈이 공부에 몰두하는 동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학교 수업이나 방과후 학교 프로그램을 잘 활용한 특징도 있었다. 이군은 차상위 계층인 데다 축구부 훈련으로 학원에 갈 형편이 안 됐다. 하지만 1학년 2학기 때부터 전 과목 1등급을 유지했다. 그는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수업시간에 졸고 집중하지 않았지만 학교 수업이 유일했던 나는 선생님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았다”고 했다. 박두선군도 “비교적 낮았던 수학 성적이 꾸준히 올랐는데 방과후 학교 강좌가 큰 도움이 됐다”고 귀띔했다.



 또래 친구들보다 부족한 환경에서 어렵게 공부했는데도 인성은 훌륭했다. 박 교수의 연구 결과 학업탄력성을 지닌 학생들의 배려심·시민의식 지수가 일반 학생보다 높았다. 박혜현양은 2012년 담임교사의 제안으로 ‘운동화’라는 봉사동아리를 만들었다. 편안한 발을 위해 희생하는 운동화처럼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자는 취지였다. 박양은 2년 동안 2주에 한 번 인근 사회복지관을 찾아가 몸이 불편한 어르신과 장애아동의 식사를 도왔다. 박군도 지역아동센터에서 후배들의 수학·과학 공부를 가르쳤다.



 이런 학생들을 이끈 조력자의 역할도 컸던 것으로 조사됐다. 박 교수는 “또래보다 어른스럽고 자기주도적이기 때문에 공부도 잘한 것”이라며 “하지만 혼자 힘으로만 된 건 아니고 지지해 주는 어른들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환경을 이겨내고 능력을 발휘하게 하려면 방과후 프로그램 등에서 값이 싸면서도 질은 높은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군은 “초등학교 때부터 다닌 지역아동센터 원장님 덕분에 과학자의 꿈을 키웠다”고 했다. 지난 6·4 지방선거 때 여수시의회 비례대표로 당선된 박성민(46·여) 의원은 2005년 작은 공부방을 만들어 지역아동센터로 발전시킨 후 선거 전까지 원장을 맡았었다. 그는 허물어진 박군 집 수리를 위해 지역 기업을 연결해 주기도 했다. 박 의원은 “두선이는 작은 도움으로도 놀라운 성과를 내는 아이였다”며 “나도 아버지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어려운 아이들을 두고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박혜현양도 “흔들릴 때마다 다잡아주신 선생님들이 없었으면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마차고 교사들은 오후 10시쯤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는 박양을 매번 집까지 데려다 줬다. 버스가 끊기는 시간인 데다 박양의 귀갓길은 인도도 없는 어둑한 시골길이었기 때문이다.



 부모의 경제적 지원보다 정서적 지원이 학업탄력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이요한군은 “선교사이자 심리상담사인 어머니가 ‘원하는 걸 이루지 못해도 네 존재만으로 소중하다’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큰 힘이 됐다”고 강조했다. 이군의 어머니 고현주(48)씨는 “보약을 먹일 형편은 못 되지만 칭찬과 격려로 심리적인 보약을 먹이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공부 근육을 기른 이들은 대학 입학 후에도 성과를 냈다. 박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이들은 대학에서 수업 참여도가 높고 성적 우수장학금도 많이 받았다. 자신감과 긍정적 마음가짐도 여전했다.



 강화도 섬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기초생활수급비로 생활하면서도 2010년 고려대·인하대 등 4개 대학에 복수 합격한 장효선(23·여)씨도 “부모님이 안 계시지만 환경에 따라 성격까지 우울해질 필요는 없다”며 “열심히 사는 게 기분도 좋고 오히려 어려운 환경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동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시신이 기증된 인하대에 입학해 일본어를 전공하면서 취업을 준비 중이다. 포스텍 수학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조현태(23)씨도 부모가 지체장애 3급인 데다 어머니는 난치병까지 앓고 있다. 그는 “올해 기초생활수급비가 줄어 가족들 생활이 어렵고 내년 대학원 학비도 마련하지 못해 걱정”이라면서도 “내 인생은 내가 만드는 것이니 극복할 수 있다는 깡다구 하나는 자신 있다”고 했다.



신진 기자 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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