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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진의 한국인은 왜] The Jjirasi

중앙일보 2014.12.15 00:02 종합 32면 지면보기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최근 국내 영어신문들에 일제히 새롭게 등장한 영어 단어 하나. 옆의 제목에 있는 말이다. 이 세 글자의 오묘한 감칠맛을 영어로는 살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국가원수의 입에까지 오른 말이니 안 쓸 수는 없고, 궁리 끝에 ‘jjirasi’라고 표기 후 괄호로 부연 설명을 하는 이례적 방식을 택했다. 뉴욕타임스 등에도 종종 등장하는 ‘jaebeol(재벌)’이라는 단어처럼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특성이 만들어낸 영어 단어의 반열에 찌라시가 위풍도 당당히 오른 거다. ‘김치(kimchi)’처럼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재되는 영광까지 누릴지도 모를 일이니 기뻐해야 하는 건지.



 괄호 속엔 이런 설명이 붙었다. “찌라시란 증권가와 언론계에서 유통되는 검증되지 않은 소문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본어에서 유래했다.”(코리아중앙데일리 12월 7일자) 그런데 이 기사를 읽은 도쿄에 사는 일본인 기자 지인이 “그 일본어 단어가 뭐냐”고 물어왔다. 국내 시중에 떠도는 대로 “뿌리다”라는 뜻의 ‘지라스(散らす)’의 명사형이자, ‘전단’ 등을 의미하는 ‘지라시(散らし)’에서 유래했다는 설을 소개하자 그는 반문했다. “근데 왜 ‘chirasi’가 아니냐. 안 좋은 거니까 일본어라고 갖다 붙인 거 아니냐”고. 자기도 기사를 써야 하니 정확히 알고 싶다고 했다. 문화체육관광부 공시 한국어 로마자 표기법상 파찰음 표기까지 검색하며 나온 건 한숨뿐.



 찌라시의 악몽, 생각해보면 처음은 아니다. 영어신문 시절 어느 미국인 에디터가 찌라시에 대해 물어보더니 이런 감상을 내놨다. “한국인들은 ‘관계자’나 ‘당국자’ ‘소식통’이라는 말 뒤에 숨은 익명성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찌라시는 그런 경향의 정점인 것 같고. 근데 좀 비겁한 것 같은데.” 당시엔 나름 반론을 펼쳤지만 요즘 들어 카카오톡 창에 난무하는 ‘받은 글’의 애매모호하고 책임회피적인 ‘카더라 통신’을 보면 같은 생각이 든다. 끼워 맞추기식 추측의 애꿎은 희생양들을 그간 상당수 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단어는 이제 영어로까지 둔갑할 정도로 힘이 세졌다. 구글 검색창에 ‘jjirasi’를 넣으면 다양한 ‘메이드 인 코리아’ 소문이 뜬다. 걸그룹에서 재계 관련 소식까지, 그것도 영어로.



 지난봄 타계한 시인 마야 안젤루는 “말은 생물과 같다”고 했다. “말은 내뱉는 순간 네 방 벽에, 네 옷에 달라붙고 결국은 네 안으로 스며든다”며 말의 무서움을 경고했다. 지금 대한민국 곳곳엔 ‘찌라시’라는 품위 없고 의뭉스러운 말이 스미고 있다. 끈적하게, 오싹하게.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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