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끝까지 버텨본 사람만 아는 마약같은 미룸의 쾌락

중앙선데이 2014.12.13 04:05 405호 34면 지면보기
해가 저무는 12월 만큼 ‘시간’이란 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때는 없다. 시간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정말 빨리 흘러간다. 어렸을 땐 계절로, 1년 단위로 흘러가던 시간이 나이가 드니 몇 년 단위로 훅 날아가 버린다. 눈 깜박하면 올림픽이고 또 깜박하면 월드컵이다. 앞으로 몇 번의 올림픽과 월드컵만 보고 나면 생을 마감할 것이다.

이윤정의 내맘대로 리스트: 미뤄주의자의 하루

어쨌든 한해가 또 가버렸다. 그러나 12월을 제외한 나머지 열한 달은 12월의 후회를 불태우기 위한 식량을 쌓아두는 시간이다. 또 한 해의 시간을 낭비해버렸다는 후회. 그 이유는 주로 매사를 미뤄버리는 습관 때문이다.

40여 년의 인생 동안 “내 사전에 ‘미리’란 단어는 없다”를 나처럼 충실하게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도 없을 것 같다. 지독히도 미루면서 살아왔다. 기자 생활, 칼럼니스트 생활을 20년 정도 하면서 마지막 마감시간이 정말 숨이 차오르게 다가오기 전까지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마감 중독’이 생겼다고 할 수도 있겠다. 맞다. 지금 이 글 역시 데스크의 독촉 전화를 몇 번이나 받은 뒤 마음이 오그라들 듯 초조해 하며 두들기고 있다. 하지만 미뤄주의자의 역사는 글 쓰는 일을 하기 전 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요즘처럼 수능세대도 아니고 객관식 시험시대 학교를 다닌 나는 시험 전날 밤을 꼬박 새면서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들을 머리에 마구 우겨넣어 시험지에서 한번 봤던 단어가 나오면 그걸로 찍어 맞히는 식으로 시험공부를 했다. 물론 전날이라고 하루 종일 성실하게 외우는 것도 아니다. 이런 식이다. 책상 앞에 앉아서도 꾸물대다 하루가 다 저물었다. 일단 한 페이지를 외우는데 얼마가 걸리는가를 재본다. 10분. 외워야할 책 페이지 숫자 전체를 세어본다. 30페이지. 총 예상 시간은 10 X 30=300분. 지금부터 아침 등교시간이 될 때까지 남아 있는 시간은 7시간=420분. 그렇다면 밤을 샐 걸 각오한다면 120분이나 시간이 남는다. 그렇다면 다시 120분을 미루고 또 꾸물대는 식이다.

이렇게 최후의 순간까지 미뤄본 사람들은 안다. 미루며 딴 짓 할 때 인간의 창의성과 새로운 삶에 대한 의욕, 청결함에 대한 욕구가 얼마나 샘솟는지. 마감 글쓰기를 앞두고 짧은 미룸을 즐기는 그때, 머릿속에서는 당장 피아노를 두들기며 녹음이라도 해야 할 만큼 멜로디가 떠오르며, 책장에서는 온갖 책들이 나의 지성과 감성 호기심을 자극하며 자신의 속살을 만져달라고 손을 내밀며, 책상과 방안의 먼지와 쓰레기들은 한껏 부풀어 올라 내 시야를 자극하는지. 내 머릿속에서는 천사인지 악마인지 ‘지금이 아니면 절대 안 된다’며 ‘반드시 그걸 해야 한다’고 속삭인다. 이 마약 같은 미룸의 쾌락이라니.

이제 미뤄주의자의 마감 글쓰기는 그럴듯한 핑계를 찾는다. 이건 미루는 게 아니라 숙성하는 단계야. 좀 더 머리와 가슴에 인풋이 있어야 좋은 아웃풋이 나오는 법이니까.

생각해보면 ‘나중’이란 일종의 판타지다. 지금 조금만 미뤄주면 ‘나중’은, 글자 하나하나가 빛을 내며 독자의 가슴을 환하게 밝혀줄 그런 글을 일필휘지로 쓰게 만들어줄 것만 같다. 그 환상과 완벽의 경지를 위해 드디어 컴퓨터를 켠다.

하지만 페이스북을 클릭하는 순간 이건 마무리가 아니라 또 다른 엄청난 미룸의 시작이다. 평소에 국어 실력을 의심했던 페친들이 마치 신춘문예라도 당선할 듯한 기세로 모두 재미있는 글들만 올려 댄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던 결심은 스르르 잊혀져 가고 어느새 나도 모르게 라이크와 댓글만 달고 있다. 그러다 보면…머리는 하얘지고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진짜 마지막 시간이 있다. 이후에 남는 건? 뻔하다. ‘난 미루는 사람’ ‘그래서 난 안돼’라는 꼬리표로 스스로를 때리기.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이 줄기차게 이렇게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살다 보면 하늘도 감동하여 죽는 날 하루는 내일로 미뤄주시지는 않을까? 아니 하늘이 그래주기 전에 내가 그럴지도 모른다. 아휴 죽는 것도 귀찮아. 내일하지 뭐. 농담이다. 새해엔 나도 시간에 대해 좀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덜 미뤄보기로 다짐해본다.

하루하루를 미루지 않고 잘살아 보겠다. 내일부터.


이윤정 칼럼니스트. 일간지 기자 출신으로 대중문화와 미디어에 관한 비평 활동을 하고 있으며 중앙SUNDAY와 창간부터 인연을 맺고 있다.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