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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측근이 준 잘못된 정보에만 의존해 문제”

중앙선데이 2014.12.13 23:57 405호 5면 지면보기
11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한-미얀마 정상회담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의 뒤로 정호성 청와대 제1부속비서관이 지나가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찌라시에서나 나오는 그런 이야기들에 나라가 흔들린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청와대 보고서 유출 파문] 계속되는 ‘문고리 권력’ 잡음

 청와대 보고서 유출 파문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인식은 사건을 바라보는 일반 시민들의 생각과는 차이가 크다. 시민들은 이번 사건을 ▶정윤회씨 등 ‘문고리 권력’의 국정농단 의혹 ▶보고서 유출 과정에서의 불법행위 여부 ▶이 과정에서 권력다툼 의혹 등 크게 세 가지 쟁점에서 진상이 규명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청와대가 생산한 문서를 ‘찌라시’로 규정하고 보고서가 유출된 한 가지 측면만 강조하고 있어 검찰 수사가 끝난 뒤에도 정치적 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통령의 상황 인식에 대해 지난 대선 때 힘을 보탠 이들조차 문제를 제기한다. 박 대통령의 대선캠프 출신인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과거 정권에서도 ‘문고리 잡음’이 있었지만 이번 사태와 결정적으로 다른 건 대통령 본인의 문제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2012년 대선 과정에서 박 대통령은 인혁당 관련 인터뷰, 정수장학회 관련 기자회견 등을 하면서 캠프 내 전문가들의 공식 조언보다는 ‘문고리 3인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가 오히려 실수를 했다”며 “자신이 믿는 사람들의 잘못된 정보에만 의존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청와대 보고서 유출 파문이 단순히 잡음에 그치는 게 아니라 비리로 확대될 가능성도 크다”며 “대통령이 사과하고 잘못된 부분을 고치는 게 최선책이지만 지금까지 봐 온 대통령의 성격상 ‘빈말 사과’도 하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고 주장했다.

역대 대통령, 파문 커지면 머리 숙여
역대 정권에서 ‘문고리 권력’의 잡음은 끊이지 않았다.

 대통령들은 논란 초기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거나 당사자를 감쌌지만 파장이 커지고 나면 부랴부랴 신속하게 대응에 나섰다. 법원의 판단이 내려지기 전이라 해도 우선 국민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자칫 정권이 흔들릴 수 있는 위기상황이란 판단에서였다.

 1996년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대국민사과를 했다. 장학로 당시 청와대 제1부속실장이 기업인들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난 직후였다. YS는 “부정부패 척결에 모범을 보여야 할 청와대 비서관이 파렴치한 비리를 저지른 것은 국민에게 대단히 송구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장 전 실장은 YS가 야당 지도자이던 시절부터 지근거리에서 그를 보좌하던 가신(家臣)이었다. YS가 이끌던 민주산악회와 ‘상도동 식구들’을 챙기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대선 승리 후 청와대에 함께 입성했지만 결국 대통령의 발목을 잡았다.

 김대중(DJ) 정부에서도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가 ‘사고’를 쳤다. 2002년 청와대 제1부속실 행정관이었던 이재만(현 청와대 총무비서관과 동명이인)씨는 ‘최규선 게이트’의 주인공인 최규선씨에게 2급 비밀 정보인 대통령의 일정을 넘겨줘 논란을 빚었고 결국 옷을 벗었다. 이씨 역시 대통령 당선 이전부터 수행비서 역할을 했다. 다리가 불편한 DJ의 거동을 돕고 지팡이를 든 채 승용차 앞 좌석에 앉은 것도 바로 이씨였다.

 노무현 정부 초기인 2003년엔 양길승 청와대 제1부속실장이 부적절한 향응을 제공받은 사실이 드러나 정권에 부담을 줬다. 양 전 실장은 노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광주·전남 조직책을 맡아 선거를 승리로 이끈 ‘공신(功臣)’ 출신이다. 이어 노 전 대통령의 변호사 사무장을 지낸 최도술 청와대 총무비서관도 당선 축하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구속 기소됐다. 노 전 대통령은 수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입이 열 개라도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제가 책임져야 한다”고 사과했다.

 이명박 정부 때에도 ‘문고리’ 잡음은 예외가 없었다. 이 전 대통령의 국회의원 비서관 출신인 김희중 청와대 제1부속실장이 저축은행에서 억대 금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구속 기소됐다. 대통령은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느냐. 모두가 제 불찰”이라고 사과했다.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 지식경제부 2차관 등을 거치며 ‘왕차관’으로 불렸던 박영준씨도 파이시티 인허가 비리, 원전 비리 등 혐의로 사법 처리됐다.

 이번 청와대 보고서 유출 파문은 이전 정권의 ‘문고리 잡음’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과거 잡음이 비리로 확대됐던 것과 달리 아직 구체적인 범죄 혐의가 발견된 것은 아니란 점에서다. 하지만 대통령 주변의 비선 논란에 청와대 내분까지 겹쳤다는 점에서 과거보다 더 큰 ‘휘발성’을 지녔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논란이 커졌을 때 신속하게 사과했던 과거 정권과 달리 대통령이 단정적인 표현을 써 가며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 대해서도 우려가 크다.

“청와대 투명하지 않으면 국민 납득 못해”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자신의 철학을 잘 알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일하고 싶은 것은 당연하지만 측근들이 대통령이 일을 잘하도록 돕는 본분을 망각하거나 선을 넘는 경우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며 “측근들이 주어진 권한과 지위 안에서 행동하게끔 교육하고 시스템 안에서 일하도록 만드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오벌 오피스(Oval Office·미국 대통령 집무실)처럼 정책보좌관들과 수시로 토론을 벌여도 ‘문고리’ 논란이 발생할 수 있는데, 정책보좌관이 아닌 부속실 비서들과만 소통한다면 대단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부속실은 주어진 역할에 그쳐야지, 이를 넘어선다면 시스템에 의한 국정 운영이 무너지는 것”이라며 “대통령이 자신이 임명하고 인사청문회를 거친 장관을 국정 파트너로 삼지 않으면 정책의 책임 소재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국민이 위임한 대통령의 권력 행사가 불투명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이 이번 사태의 핵심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근주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는 “정치적 영역과 정책적 영역은 공식적으로 분리돼야 하고 역할이 나눠져야 한다”며 “경험과 전문성을 갖춘 중앙부처 공무원이나 정책보좌관을 제쳐 놓고 부속실과 국정을 논할 경우 행정부 자체가 무력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대통령이 정확한 판단을 하기 위해선 정보를 얻는 루트가 다양할수록 좋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건 결정 과정이 투명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현 청와대는 역대 어떤 정권보다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보가 없는 것 같은데, 투명성을 높이지 않고서는 청와대 결정에 대한 국민의 수용도 역시 낮을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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