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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의 불문율 "미성년 퍼스트 키즈는 건들지 마라"

중앙일보 2014.12.13 00:45 종합 20면 지면보기
11월 26일 ‘칠면조 행사’에 참석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딸 말리아(오른쪽)·사샤. [중앙포토]


지난달 말 미국 백악관에선 추수감사절을 맞아 ‘칠면조 사면 행사’가 열렸다. 추수감사절에 희생되는 칠면조들을 대표해 요리용으로 백악관에 잡혀온 칠면조 한 마리를 풀어주는 전통 의식이다.

늘 주목받는 미국 대통령의 딸들



 해마다 열리는 행사가 올해는 ‘사건’이 됐다. 행사에 참석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두 딸 말리아(16)와 사샤(13)가 논란에 휩싸이면서다. 스티븐 핀처(공화·테네시) 하원의원의 공보담당 보좌관 엘리자베스 로튼이 이들의 옷차림을 문제 삼아 “백악관에 들어갔으면 점잖은 척이라도 해라. 존중받을 만한 옷을 입어라. 술집 갈 때나 입을 법한 옷 말고”라며 훈계하듯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것이다. 로튼은 거센 비난을 받았고 결국 지난 1일 사임했다. 10대인 오바마의 딸들에게 부적절한 표현을 사용한 데다 워싱턴의 불문율을 깼기 때문이다. ‘퍼스트 키즈’는 거론하지 않는다는 철칙이다. 특히 말리아·사샤처럼 성인이 아닌 대통령 자녀에 대한 언급은 금기다.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아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와 배려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대통령의 자녀는 늘 관심 대상이었다. 존 F 케네디의 두 자녀 캐럴라인과 존 주니어가 대표적이다. 캐럴라인은 4세 때 백악관에 들어갔고, 존 주니어는 케네디 취임 17일 후 태어났다. 1901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3~16세 사이의 여섯 자녀와 함께 백악관에 입성한 후 60년 만에 ‘백악관 어린이’를 맞은 미국인들은 열광했다. 마침 TV 등 매체가 보편화되면서 언론이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쫓기 시작했다. 이를 불편해했던 재클린 케네디는 아예 언론의 접근을 차단하는 방식을 택했다. 백악관 3층에 캐럴라인을 위한 유치원을 만든 것이다. 전문 교사가 채용됐고 백악관 직원 자녀 등 10여 명이 백악관으로 통학했다.



 뒤 이어 취임한 린든 존슨 대통령의 둘째 딸 루시 베인스 존슨은 16세에 백악관으로 이사했다. 루시는 ‘퍼스트 키즈’ 생활에 대해 “얻는 건 없이 비판만 받는다”고 불평했다. 훗날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선 이런 구체적인 상황도 털어놨다. “성적이 좋지 않으면 전혀 모르는 사람까지 나를 야단쳤다. 평균 B 이상 받았다는 뉴스가 나왔을 땐 자랑하느냐고 탓했다.”



1979년 지미 카터 대통령과 방한한 에이미. 청와대 현관에서 책을 읽고 있다. [중앙포토]
 77년 지미 카터가 39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막내딸 에이미는 9세였다. 케네디 가족 이후 오랜만에 등장한 ‘백악관 어린이’에게 관심이 쏟아졌다. 워싱턴 공립학교로 첫 등교하는 날엔 언론이 총출동했다. 에이미는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롤러 스케이트를 타고 사우스론에 오두막집을 짓고 놀았다. 경호원들은 오두막에 친구를 초대해 파자마 파티를 여는 에이미를 지켜봐야 했다. 아동 인권 등에 둔감했던 당시 언론은 때로 에이미에게 가혹했다. 책을 읽으며 지루한 국빈 만찬을 견디곤 하던 에이미에게 한 기자는 “통탄할 정도로 버릇없고 끔찍한 매너를 가진 징징대는 녀석”이라고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대통령 부모들과 달리 카터는 딸을 언론과 격리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대선 토론에도 딸을 끌어들였다. 80년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로널드 레이건과의 토론에서다. 카터는 안보 문제 토론 중 “여기 오기 전 에이미와 가장 중요한 이슈가 무엇인지 대화했는데 딸이 핵무기 얘기를 하더라”며 화제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는 13세짜리 딸에게 안보 조언을 듣냐는 비아냥만 샀고 선거에서 참패했다.



98년 휴가를 떠나는 빌 클린턴 대통령 가족. [중앙포토]
 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외동딸 첼시는 13세 때 백악관으로 이사했다. 클린턴 부부는 딸이 평범한 10대 시절을 보내기를 바랐고 딸을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 대통령 부인 힐러리는 국빈 만찬 등 공식 행사에 딸이 참석했을 때도 취재에 주의해달라고 언론에 당부하기도 했다. “공립학교를 거부하는 것이냐”는 비난을 무릅쓰고 사립학교로 전학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딸의 사생활을 보호했던 클린턴 부부도 결정적인 순간에 딸을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의혹을 샀다. 98년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 폭로로 클린턴이 정치적·가정적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다. 클린턴이 ‘관계’를 시인한 후인 그해 8월 언론엔 클린턴 가족이 나란히 손잡고 휴가를 즐기는 사진이 공개됐다. 사진 속에서 첼시는 양손에 부모의 손을 각각 잡고 있다. 부부 관계가 문제없이 봉합됐다고 보여주기 위해 딸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말리아와 사샤의 추수감사절 옷차림 논란이 일어난 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딸 패티 데이비스는 오바마 대통령의 딸들에게 공개 편지를 썼다. 자신도 아버지가 대통령 재임 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의 만찬 자리에서 만찬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었다는 언론의 지적을 받았다며 이런 말을 남겼다. “결코 너희들이 이길 수 없단다. 자신의 삶에 분노하며 그 분노를 너희들에게 쏟아내기 위해 키보드 앞에 앉아 욕을 일삼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다. 현재 너희들의 삶에서 평범한 건 아무것도 없겠지만 여전히 너희들은 평범할 수 있단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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