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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생선, 우리가 몰랐던 민간외교관

중앙일보 2014.12.13 00:32 종합 24면 지면보기
1930년대 함경남도 앞바다에서 조선 어부들이 자망(刺網)을 이용해 명태를 잡고 있는 모습. .일본지리풍속대계. 조선편 상권에 실린 사진이다. [사진 따비]


한일 피시로드

넙치, 명란젓, 갯장어 오토시 …
수산물이 한일 관계 윤활유 역할
교역뿐 아니라 학문 교류도 활발
‘자산어보’ 번역한 정문기 재평가

다케쿠니 도모야스 지음

오근영 옮김, 따비

368쪽, 1만8000원




“중국과 서역 사이에 고대 실크로드가 있었다면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근현대 피시로드가 있다.” 일본의 현대문학 교수이자 다큐멘터리를 찍듯 현장을 답사해서 얻은 정보로 책을 쓰는 답사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인 지은이 다케쿠니 도모야스(竹國友康)의 주장이다. 지은이의 한·일 피시로드 답사는 새벽 바람이 세찬 부산항에서 시작한다. 한국과 일본을 잇는 페리호에는 일본 각지의 번호판을 붙인 트럭들이 실려 온다. 부산항에 상륙한 일본 트럭들은 일본에서 잡았지만 한국인이 좋아하는 수산물을 풀어놓고, 한국에서 잡았지만 일본인이 즐기는 수산물을 가득 채우고 떠난다. 지은이는 한·일 양국이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물량의 수산물을 교류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페리가 일본에서 수산물을 실은 트럭을 싣고 오는 이 현장도 앞으로 유명한 관광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벽의 자갈치 수산물 경매장과 함께 말이다.



 지은이는 오사카의 해산물 선술집에서 먹는 넙치는 부산에서 활어 차로 실어온 것이고, 교토 요릿집의 고급 명물요리인 ‘갯장어 오토시’의 재료는 상당수가 한국산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일본에서 한국산 갯장어는 일본산보다 비싼 값에 거래된다고 한다. 수산물 교역이야말로 서로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좋은 값에 팔아 모두가 이익을 볼 수 있는 소중한 경제활동이라는 것이다. 수산물 교역은 오랫동안 한·일 관계의 윤활유였다.



 한·일 간 대규모 교역의 대상이 된 최초의 물고기가 명태다. 정확히 말하면 명란젓이다. 일본어로 명태는 ‘스케토라다’라는 정식 명칭이 있지만 가리시멘타이코(辛子明太子)나 멘타이(明太)라는 용어가 더 많이 쓰인다. 지은이는 이 말이 한국에서 왔다고 지적한다. 명태알로 만든 명란은 일본인이 즐겨 먹는 음식의 하나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식산국 수산과에서 일했던 기사 정문기는 1936년 발표한 ‘조선명태어’라는 논문에서 이 명란젓이 일본은 물론 중국과 만주에까지 보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논문에는 ‘명란젓이 가장 많이 소비되는 지방이 시모노세키이고 그 다음이 경성(서울)·부산·도쿄·함흥·대구의 순’이라고 돼 있다. 34년 통계에 나온 명란젓 취급량은 시모노세키가 7만1729통이고 2위인 경성은 1만3295통으로 1·2위 간에 큰 차이가 있다. 일본인은 명태를 먹는 일이 거의 없지만 명란젓만은 이미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식탁에 인기 식품으로 올랐음을 알 수 있다.



 비타민 A가 풍부하게 들어 있어 눈에 좋은 명태 간유도 이 무렵 약용으로 제조되기 시작했다. 정씨 논문에 나오는 ‘생산지에서 등잔용 기름으로 소비됐을 뿐 그 외에는 특별히 이용되지 않았지만 최근 약용 간유를 제조하기 시작하고부터는 대부분 이 원료로 소비되기 시작했다’는 대목이 근거다. 어려서 눈 밝아지라고 먹던 간유의 기원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명태는 생선전이나 북어의 형태로 차례·제사·고사에 널리 쓰이며 액막이용 제물로 묻거나 걸어두는 등 민간신앙과도 관련이 깊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식품이라는 틀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인의 정신적인 영역에도 깊이 관여한다고 지적한다. 한 번에 25만~40만 개의 알을 낳는 다산성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버리는 부분이 하나도 없는 알뜰함 때문에 주술과 관련을 맺게 됐다고 여긴다. 그만큼 한국인의 삶에서 지극히 중요한 생선이라는 것이다.



 명태잡이는 18세기 중반 무렵부터 한국에서 활기를 띠어 곳곳에 먹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치어인 노가리 남획 등의 이유로 통계상 어획량이 ‘0’이 됐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러시아에서 동태 상태로, 일본 홋카이도에서 생태 상태로 수입된다. 두 나라에서는 국내 소비를 하지 않고 오로지 수출을 위해 명태를 잡는다. 한국 바다에서는 이제는 사라져버린 명태를 생각하며 황태 해장국의 따뜻함을 떠올리는 사람은 지은이만이 아닐 것이다. “명태야, 어느 바다라도 좋으니 반드시 길이길이 살아남아다오”라는 지은이의 기원이 간절하다.



 지은이는 한국 어류학 연구의 선구자인 정문기(1898~1995)를 집중 소개한다. 전남 순천사람으로 중앙학교(현 중앙고)를 거쳐 도쿄 제국대학 농학부 수산학과에서 공부한 인물이다. 정씨는 조선인의 손으로 조선 수산업을 일으키겠다는 생각으로 법학 전성기인 당시 굳이 수산학을 전공으로 골랐다. 정씨는 일본 수산학자들과 교류하며 정보를 교환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은행 총재로 어업 등을 연구한 민속학자이기도 한 후지사와 게이조(1896~1963)와도 친교를 맺었다.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흑산도에 유배 중이던 1814년에 쓴 수산물 보고서 『자산어보(玆山魚譜·현산어보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를 정씨가 현대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을 하면서 후지사와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은 수산업의 수확물뿐 아니라 연구에서도 서로 활발하게 교류했던 것이다. 부산 영도 남항동에 있던 조선총독부 수산시험장의 37년 모습, 50년대 강원도 연안의 명태 주낙잡이 광경 등 사진 자료도 눈에 띤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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