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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공개 문턱 낮춰 벤처 보릿고개 넘게 해줘야

중앙일보 2014.12.12 01:27 종합 5면 지면보기
지난 10년은 벤처 빙하기였다. 2000년 봄 닷컴 거품 붕괴 이후 정부 규제로 벤처생태계의 성장판이 닫혔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가 활성화에 나섰지만 곳곳에 병목 현상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벤처를 어떻게 되살릴지 짚어봤다.


돈·인력 해결할 IPO 너무 지체돼
기술 개발보다는 경영에만 매몰
좋은 실패와 나쁜 실패 구분해야
'재도전 인증제' 도입 고려할 때

1996년 서울대 유전공학연구소를 이끌고 있던 41세의 김선영 교수는 학내 연구원들과 국내 최초 캠퍼스 실험실 기업 ‘바이로메드’를 설립했다. 미국 하버드대와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바이러스를 연구한 그는 유전자치료 기술을 영국과 일본 회사에 수출하기도 했다. 설립 9년 만인 2005년 코스닥에 회사를 상장시켜 현재 시가총액은 7500억원이 넘는다. 바이로메드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비교적 빨리 기업공개(IPO)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 덕에 김 교수는 2009년 전문경영인을 영입한 뒤 연구·개발총괄(CSO)로 물러나 연구개발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바이로메드가 IPO 이후에도 잇따라 신기술 개발에 성공한 비결이다. 미국 바이오 벤처의 산실로 불리는 랭거연구소 출신의 미 하버드대 오미드 파로크자드 교수도 신속한 IPO와, 경영과 연구의 분리가 벤처 성공의 열쇠라고 꼽는다. 벌써 4개의 벤처를 창업해 IPO까지 마친 그는 앞으로도 6개 정도 회사를 더 창업할 계획이다. 창업은 그가 주도하지만 일단 IPO 단계를 넘어서면 경영에선 손을 뗀다.



 그러나 국내에선 IPO까지 기간이 너무 길다 보니 경영과 연구의 분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IPO를 하기까지 창업자가 경영에만 매몰돼 초기에 신데렐라처럼 등장했던 벤처도 IPO 이후 신기술 개발에 실패해 고사하는 사례가 많다는 얘기다. 아예 IPO 문턱을 넘기도 전에 좌절하는 벤처도 적지 않다. 벤처는 위험이 큰 만큼 보상도 커야 한다. 그래야 벤처생태계가 번성할 수 있다. ‘벤처=IPO’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IPO 한 방으로 ‘벤처 대박’ 신화를 쓰는 창업가가 많이 나올수록 돈과 인재가 벤처시장으로 모인다. 그러나 2005년 코스닥과 거래소를 통합하면서 국내 벤처는 창업부터 IPO까지 기간이 과거의 두 배로 연장됐다.



전상용 KAIST 교수는 “국내에선 아무리 유망 벤처라도 창업에서 IPO까지 10~15년이 걸린다”며 “벤처생태계를 살리자면 IPO 기간부터 단축해 벤처 신화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벤처는 성공 확률이 작기 때문에 재도전의 기회를 주는 것도 중요하다. 실패에 대한 주홍글씨·낙인을 지워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실패를 좋은 실패와 나쁜 실패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정부도 지난해 10월 재도전 지원체계를 발표했다. 연대보증 완화, 자금 규모 확대 등 제도 개선이 이뤄졌다.



이영달 동국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재도전 인증제 도입이 시급하다”며 “정부가 사업 실패의 원인을 네 가지로 구분해 옥석을 가릴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실패의 유형을 외란형(통제할 수 없는 외부 환경에 의한 것), 혁신형(혁신적 기술과 사업모델을 기반으로 했으나 시장환경·기업환경의 미성숙으로 인한 실패), 부패형(사적 이득을 취할 목적으로 기업 망치기), 한계형(기술·사업모델·경쟁력 한계)으로 구분했다. 이 교수는 “재도전기업 인증제를 통해 외란형·혁신형 실패 때는 재도전의 기회를 줘야 한다”며 “한계형 실패의 경우 사업 전환 등도 같이 유도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본지 설문조사에서도 ‘벤처창업가가 실패를 줄이고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재도전기업 인증제와 같은 지원제도(17.5%)’를 가장 많이 꼽았다. 다음의 공동창업자인 이택경 프라이머 대표도 “정부와 관련 기관도 실패한 벤처창업가의 상처를 최소화하는 배려가 필요하다”며 “설사 망하더라도 연착륙할 수 있는 플랜B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발상의 전환도 필요하다. 안보에만 얽매이지 말고 세계적 수준의 방위산업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벤처를 육성하는 정부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제안도 나온다. 대표적 성공 사례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샌디에이고(캘리포니아). 특히 샌디에이고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 해군항에 불과했으나 1970~80년대 ‘벤처기업 천국’으로 부상했다. 군통신망 기술을 활용한 무선통신 등 정보기술(IT) 산업은 샌디에이고의 대표 벤처사업이다. 현재 퀄컴을 비롯한 3000개 IT 기업이 몰려 있고, 관련 벤처기업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에이브러햄 시레그 KAIST 경영대학원 교수는 “한국의 강점인 방위산업을 벤처에 활용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발상의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강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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