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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진 역사도 우리의 일부 … 아픔도 유산이다

중앙일보 2014.12.12 00:41 종합 23면 지면보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취조실. 현재는 인권의 중요성을 알리는 경찰청 인권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신인섭 기자]


국제 노예박물관에 보관된 노예 족쇄. [신인섭 기자]
영국 리버풀에 있는 ‘머지사이드 해양박물관’은 대영제국의 화려했던 해양시대를 응축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두고 군림했던 방대한 규모의 무역과 스페인의 무적함대마저 무너뜨린 영국 해군의 수백년 역사가 기록돼 있다. 지난달 2일 기자가 찾은 이 곳의 마지막 동선에는 뜻밖에도 ‘국제 노예 박물관’이 있었다. 영국의 황금기가 어떤 이들의 희생으로 가능했는지를 보여주는 장소다. 기자는 1676년 노예가 남긴 기록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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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사람 안에는 악마가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일하게 한다. 흑인을, 말을, 엉덩이를, 심지어는 나무와 바람마저도.”



 수십 명의 노예의 발은 족쇄로 묶여 있다. 손엔 수갑이, 입엔 재갈이 물려 있다. 당시 리버풀의 무역수입을 지탱한 건 면직물이 아니라 노예였음을 밝히고 있다. 매출의 3분의 1은 노예장사로 발생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관광객 안토 무니(40)는 “강성대국의 역사를 노예에 관한 기록으로 마무리할 수 있게 사회적 합의를 이룬 영국이 놀랍다”고 말했다.



 해양시대의 스토리는 노예들에게도 비극적이지만은 않다. 영국인들은 ‘악마같은 영국인’과 동시에 ‘보편적 인권의 시대를 연 영국인’을 동시에 보여준다. 영국 시민단체 ‘잉글리시 헤리티지’가 매입해 보존한 켄우드 하우스에는 ‘첫 흑인 귀족 소녀’의 모습이 담긴 회화작품(1779년)이 전시돼 있다. 그녀는 백인들과 동등하게 화려하게 표현돼 있다. 그녀의 후견인이었던 맨스필드 백작의 헌신이 만들어낸 결과다. 백작은 노예제 폐지를 앞당긴 ‘서머셋 재판’의 담당 판사였다. 이 역사적 이야기는 영화와 소설로 끝없이 리메이크됐고, 소설 ‘다이도 벨의 실제 이야기’는 올해 영국에서 크게 히트했다.



 영국의 사례는 역사 속 ‘네거티브 유산’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보여준다. 과거 조상의 잘못도 우리의 일부이며, 지금 우리의 모습은 그 모든 것을 극복한 결과물이라는 하나의 서사를 완성시켜주는 중요한 자산이다.





 근·현대 유산을 보존하는 서울시 미래유산 사업도 다양한 네거티브 유산을 확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가옥 인근에는 1967년 중앙정보부가 지은 ‘윤보선 감시건물’이 존재한다. 북촌 정독독서관과 옻칠공방-송원아트센터를 거쳐 걷다보면 만나는 허름한 건물이다. 5층 높이의 오래된 주택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전형적인 망루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당시 중정 관계자는 90년대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윤보선을 암살하려던 저격수가 대기했던 곳”이라고 폭로하기도 했다.



 지금은 박종철 기념관으로 탈바꿈한, 대학생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숨진 ‘남영동 분실’도 네거티브 유산이다. 일제시대 일본 장교의 관사, 1·21사태 때 총탄 흔적이 남은 소나무도 마찬가지다. 이화사학연구소 강정숙 연구원은 “과거로부터 배우고 생각하는 것이 역사의 본질이라고 봤을 때 네거티브 유산은 우리의 성장을 위한 하나의 원전”이라며 “압박을 가했던 이들이 오히려 이런 유산을 두려한다는 건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난징학살을 집요하게 기록하고 전시하며 일본을 압박하는 중국의 최근 정책도 네거티브 유산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신형식 기획홍보실장은 “CIA고문 사건을 보면서 ‘고문이 나쁘다’라는 선언만으론 과거의 나쁜 관행을 바꿀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며 “결국 끝없이 기억하고 되새기는 수밖에는 없다”고 말했다.



리버풀(영국)=구혜진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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