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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뜰 안의 매화, 아세안에 활로 있다

중앙일보 2014.12.12 00:09 종합 32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강일구]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1990년 말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따라잡지 못하는 18가지 이유』란 당돌한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한국에서 28년간 일한 일본 종합상사맨의 따끔한 충고로, 사회적 수준이 나아지지 않는 한 일본을 못 넘을 거란 진단이었다. 이 무렵 일본 내에선 한국기업 경계론이 고개를 들었다고 한다. 하나 결론은 “걱정할 것 없다”는 쪽으로 모아졌다. 기술은 좀 있을지 몰라도 기업윤리 등 사회 전반의 수준이 떨어져 일류 회사로 발전하긴 어려울 거라는 게 중론이었다. 심지어 “한국에선 아직도 연탄가스를 마시고 매년 수없이 죽는다”며 “이런 후진 사회가 위협이 될 수 있겠느냐”는 식의 조롱 섞인 이야기도 퍼졌다.



 결과는 어땠나. 2009년 일본의 9대 가전업체의 이익을 합쳐도 삼성의 절반도 안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때 세계 시장의 70%를 장악했던 일본 반도체 업계는 한국에 밀려 대부분 망하고, 2012년 마지막 남은 엘피다마저 도산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한국과 한국 기업을 우습게 본 대가다.



 우리라고 켕기는 데가 없는 게 아니다. 새롭게 떠오르는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국가들을 볼 때 비슷하게 보는 건 아닐까. 일반인들의 뇌리 속에서 태국·인도네시아·필리핀은 주로 휴양지로 각인돼 있다. 심각한 무역 파트너란 인식은 거의 없는 듯하다.



 하지만 아세안 10개 회원국을 합쳐보라. 그 위상이 어마어마하다. 지난해 총 교역량 1조750억 달러 중 아세안의 비율은 1353억 달러. 전체의 13%로 중국(21%)에 이어 2위다. 미국·일본보다 높고 유럽연합(EU) 전체(1051억 달러)보다 월등하다. 특히 전체 무역수지 440억 달러 중 여기서 건진 흑자가 65%에 달해 결코 무시해선 안 되는 지역이다.



 더 중요한 건 이 지역이 단단한 공동체로 빠르게 진화 중이란 거다. 공동체를 일궈내는 작업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은 단일통화에 통일된 대외정책을 자랑하지만 EU도 초기에는 무척 힘들었다.



 ‘유럽합중국’ 창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건 영국의 명재상 윈스턴 처칠이었다. 유럽 대륙으로부터의 독립을 지키려는 전통이 강한 영국 총리가 이런 파격적 주장을 한 건 순전히 안보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은 그로서는 제3차 세계대전을 막는 최선책이 유럽을 하나로 묶는 것이라 믿은 것이다.



 이런 정치적 고려에다 거대한 단일시장의 매력으로 유럽 대륙은 자발적 통합이라는 전인미답의 길을 걷는다. 물론 터무니없는 망상이란 비판도 많았다. 대표적 반대론자가 공교롭게도 같은 영국 총리인 마거릿 대처였다. 그는 “통합된 유럽이란 허영심의 상징물이며 최종 종착지가 실패일 수밖에 없는 프로그램”이라고 악담을 쏟아낸다. 그럼에도 내부 반대와 회원국 간 갈등에도 불구, 끈질긴 노력 끝에 28개 회원국을 거느린 유럽합중국에 다가서게 된 것이다.



 이런 EU의 선례가 있는 터라 아세안의 통합 노력은 결코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아세안 회원국들은 내년 말까지 ‘아세안경제공동체(AEC)’를 출범시킨다는 목표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 이 꿈이 실현되면 인구 6억4000만 명에 역내 총생산 3조 달러를 넘는 거대한 단일시장이 새롭게 탄생하게 된다. 이뿐 아니다. 단일시장 완성 뒤 ‘아세안정치안보공동체(APSC)’를 건설하겠다는 웅대한 꿈도 꾸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경제를 먹여 살려 온 중국의 성장 엔진이 빠르게 식고 있다. 최근 발표에 따르면 올해 중국의 성장률은 7.5%. 5년 만에 최저치다. 과거처럼 10% 안팎의 고도 성장기는 지난 셈이다. 그렇다면 최대 교역국인 중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온 한국 경제는 어디에서 대안을 찾아야 하나.



 세계적 싱크탱크 스트랫포의 조지 프리드먼 소장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바 있다. ‘21세기의 노스트라다무스’로 칭송받는 그는 중국 시장이 꺼지는 ‘탈중국(post China) 시대’엔 다른 16개 시장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중 가장 현실성 있어 보이는 지역이 인도네시아·베트남·미얀마 등 동남아 국가들이다. 결국 아세안에 답이 있다는 얘기다.



 더 주목해야 할 건 이 기회의 땅에서 달콤한 과실을 거둬들이는 데 한국만한 나라가 없다는 점이다. 한류 덕에 조성된 막연한 한국 문화에 대한 동경심 때문만은 아니다. 아세안 국가들은 한국의 근대사에서 성공의 비결을 찾고 싶어한다. 특히 효율적인 정부 및 공무원 조직, 전자 정부 등에 관해서 기를 쓰고 배우려 한다. 한국 정부도 이런 요구에 호응해 많은 노력을 쏟았다.



 외국공무원 연수를 주관하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 따르면 91년 설립 이래 4만9000여 명이 한국을 방문해 연수를 받고 돌아갔다. 그중 아시아에서 온 숫자가 51%로 2만4000여 명에 달한다.



 이들은 대부분 더없이 좋은 인상을 갖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러니 이런 탄탄한 인적 네트워크를 내팽개치고 엉뚱한 곳에서 기회를 찾는 것만큼 아둔한 일도 없다. 전통적인 4강 외교에만 외교력을 쏟을 때가 아니다. 뜰 안의 매화, 아세안에 마땅한 정성을 쏟아야 우리에게 활로가 있다.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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