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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칼럼] 대통령이 문제다

중앙일보 2014.12.12 00:03 종합 35면 지면보기
김진국
대기자
‘정윤회 파문’의 종착지가 대충 드러나고 있다. 유출 과정은 윤곽이 보인다. 문건 내용도 사실무근이라는 결론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수사는 이렇게 물살을 타고 있지만 그것으로 의혹을 걷어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검찰의 설명에는 석연찮은, 좀 더 규명이 필요한 대목들이 없지 않다. 그런 부분들을 일일이 따지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반드시 풀려야 할 것이 있다. 비선이 국정에 영향을 미쳤느냐 하는 의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으로선 답답할지도 모른다. 거론되는 인물이 오래전부터 ‘심부름’이나 하던 비서들이다. 그들이 국정을 농단한 ‘실세(實勢)’라니 어이가 없을 수도 있다. 오죽하면 ‘진돗개’에 비유했을까. 그렇지만 박 대통령만큼 청와대 생활을 오래한 사람이 없다.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다. 그렇다면 지금 제기되는 의혹들을 허술하게 넘길 일이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택연금에서 풀린 직후인 1987년 몇 달 동안 새벽같이 찾아가 아침을 함께 먹은 적이 있다. 찾아온 기자가 한동안 필자 혼자였다. 그러자 동교동을 드나드는 정치인들이 접근했다. 이렇게 권력은 자리가 아니라 최고권력자와의 거리에서 생긴다.



 박 대통령은 “찌라시에나 나오는 그런 얘기들에 이 나라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은 정말 대한민국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정작 부끄러운 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찌라시 같은 얘기’다. 그런 얘기를 믿게 만든 환경이다. 문제는 정씨가 아니라 박 대통령이라는 말이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증언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박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도 ‘비선 실세’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박지만씨와의 갈등은 박씨가 정씨를 실세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론이며 국민을 나무랄 일이 아니다. 왜 이런 지경이 됐는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그런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



 이런 소문은 오래됐다. 야당 의원 시절, 후보 시절에도 나돌았다. 혼자 할 수 없는 중요한 결정·발언·인사를 했는데, 공식 라인에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니 누가 그런 역할을 하느냐가 기자들에게는 오래된 숙제였다.



 야당 의원이라면 비공식 조언을 받는 걸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하지만 대통령은 다르다. 대통령의 결정은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 영향을 미친다면 큰일이다. 그런 생각이 이번 사달의 출발점이다. 박 대통령이 정씨를 쓸 수도 있다. 그러려면 자리를 줘야 한다. 민간인은 사정기관이 조사할 수 없다. 언론의 검증도 피해 간다.



 최근 이명박(MB) 대통령 시절 한 참모가 이 정부 초기 실력자로 알려졌던 모 수석비서관과 식사를 하다 “(대통령과) 독대를 해 봤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정부에선 대통령 만나기가 너무 어렵다는 말이 많다. 장관이나 수석들도 서면보고만 한다는 것이다. 전화를 해도 단답형 답변만 듣고 끊어 버린다는 말까지 나돈다.



 박 대통령은 밤늦게까지 보고서를 읽는다고 했다. 문서로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은 제한적이다. 더군다나 국정은 수능 준비와는 다르다. 구체적인 사항을 모두 알 필요도 없고, 외울 필요는 더더구나 없다. 장관과 수석으로부터 얘기를 듣고 중요한 결정만 해 주면 된다. 국정 방향도 그렇게 정리해야 한다.



 간단한 메모만으로는 대통령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대통령의 뜻이 모호할수록 문고리 권력의 힘은 커진다. 대통령의 표정·말투·어조까지 중요한 정보가 되고, 대통령의 뜻으로 왜곡된다.



 중국 춘추시대 진(晉)의 자객 예양(豫讓)은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士爲知己者死)” 고 했다. 보통사람으로 쓴 범씨(范氏)와 중행씨(中行氏)에게는 보통으로 섬겼지만, 국부로 모신 지백(智伯)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쳤다. 최고의 인재라고 고른 장관을 어떻게 쓰느냐는 대통령에게 달렸다.



 대통령을 만나지 못하는 장관은 맥을 출 수 없다. MB 시절 이동관 홍보수석이 궁지에 몰렸을 때다. 집권당에서까지 교체설이 나왔다. 한 행사장에서 MB가 이 수석을 손짓해 불렀다. 귓속말을 하고 함께 웃었다. 그것으로 여당 내 비난여론이 가라앉았다. 대화는 사소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대통령을 만나는 것 자체가 힘이다.



 찌라시를 탓할 일이 아니다. 보고서를 제쳐 놓아야 한다.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알 수도, 할 수도 없다. 장관을, 수석을 직접 만나 말을 들어야 한다. 대통령이 최고의 전문가라고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힘을 주고 동반자로 삼아야 성공할 수 있다. 문을 열어 놓아야 문고리가 설치지 못한다.



김진국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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