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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내 인생의 배역

중앙선데이 2014.11.30 03:26 403호 27면 지면보기
오늘 길 한 모퉁이에 서 있는 빨간 단풍나무를 봤다. 우산을 들고 한참 서 있는데 마치 그 나무가 나를 기다리듯 붉은 잎새를 내려뜨렸다. 이 비가 그치면 곧 겨울이 찾아오겠지, 며칠 전 달력을 보니 소설(小雪)도 지났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 꼭 세월 이야기 하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세월도 각자의 느낌만큼 상념이 되고 소화되는가 싶다. 들녘에 나가 보니 어느덧 벼들도 추수해 빈 들녘만 남아 있다. 농부들은 부지런도 하지…, 혼자 생각의 여백이 크다.

후배 어머니가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열반하셨다는 소식에 열 일 제치고 밤중에 장례식을 찾았다. 출가해서 경사에는 되도록 가지 않았지만 애사는 그래도 찾아뵙는다. 그것이 예의이고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쓸쓸할 것 같아 먼저 갔지만 나같이 생각을 했음인지 다른 교무들도 이미 와서 위로를 하고 고인의 살아생전에 대한 담소를 했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살아생전에 어떻게 모셨을까 해서다.

출가하면서 어머님·아버님이 차례로 편찮으셔서 결국 부모님 모시고 사회복지시설에서 함께 기도생활을 했다고 했다. 그것도 6남매 중 막내가 부모를 끝까지 모시고 출가생활을 했다는 것이 너무도 처연하고 기특하기만 했다. 동기들이 많아 오빠와 동생들은 기독교·천주교·불교 등으로 각각 나뉘어 망자를 애도하고 있었다. 덕분에 4대 종교 신도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비 오는 날 숙연함이 더했다.

돌아가시기 전 후배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단다. “걱정 마라, 내 배 위에다 교도증 꽃고 갈 테니.” 그 뜻은 막내가 원하는 원불교식 장례 절차를 바랐다는 것이다. 정성스러운 기도염불, 그리고 청정한 법문에 의지한 마지막 세상길을 원했던 것일까.

홍엽빙설(紅葉氷雪)이라 붉은 잎새가 눈이나 얼음에 얼어 더 붉거나 안타깝게 보이는 마음이다. 우리의 삶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언제일까. 누군가 말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지금, 누군가는 내일까지만 살고 싶다고 몸부림치다 떠난 그날을 우리가 살고 있다고.

후배가 보내온 또 한 권의 책에는 자신이 출가해 청춘을 바쳐 모셔 온 큰 스승님의 거룩한 행장이 엮여 있었다. 글 중에 가장 맘에 드는 구절은 두 가지였다. 스승님은 아침에는 마음의 때를 벗기는 고요한 선(禪)이 있어야 원만한 수행력을 갖게 되며, 밤에는 하루 동안 몸과 입과 생각으로 남을 해친 일이 없는지를 반성하는 것만이 영혼을 청정하게 한다는 백척간두 수행력을 실천하셨다고 했다. 스승님이 열반하실 때까지 5가지의 수신은 이렇다. 첫째 크게 안정할 일(大 安定), 둘째 음식을 존절히 할 일(節 飮食), 셋째 병과 약을 잊을 일(忘 病藥), 넷째 보고 듣는 것도 삼가고 적당한 활동을 할 일(斷 見聞), 다섯째 깊은 생각으로 번뇌를 끌어들이지 말 일(勿 思慮).

에픽투테스의 말처럼 어쩌면 인생은 끝없는 배역과 연출의 연속일지 모른다. 누구는 수행자가 되고 누구는 나라를 지킨다. 누구는 밤새워 연구를 하고, 누구는 그림을 그린다. 또한 누구는 일생을 운둔과 고요로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 배역을 선택하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듯, 어느 날 운명처럼 다가온 삶의 순간도 그저 덤덤히 맞이할 뿐이다. 석양의 그림자가 아름다운 것은 그만큼 깊고 아름다웠던 자신의 내면이 비치기 때문이지 않던가.



정은광 원광대학교 미술관 학예사. 미학을 전공했으며 수행과 선그림(禪畵)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마음을 소유하지 마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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