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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아픈 아들 위한 위로·힐링 그림 편지가 아동 문학의 전설로

중앙선데이 2014.11.29 02:15 403호 14면 지면보기
“깊은 숲 속 / 아주 아주 커다란 전나무 밑동 / 모래 언덕 토끼굴에 / 엄마 토끼랑 꼬마 토끼 네 마리가 살았어요. / 꼬마 토끼들의 이름은 / 플롭시, 몹시, 코튼테일, 그리고 피터였어요.”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6> 피터 래빗과 베아트릭스 포터

맨 마지막에 등장한 토끼에 대해서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바로 ‘피터 래빗’이다. 꼬마 토끼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엄마의 충고가 이어진다. “들판이랑 샛길이랑은 나가 놀아도 좋다마는 맥그리거 아저씨네 텃밭에는 들어가지 말거라. 맥그리거 부인이 아빠 토끼를 잡아갔단다.”

아빠를 잃은 토끼 가족은 어땠을까. 엄마 말 잘 듣는 플롭시, 몹시, 코튼테일은 산딸기를 따러 오솔길로 갔지만, 말썽꾸러기 피터는 혼자서 맥그리거 아저씨의 텃밭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상추를 뜯어 먹고 강낭콩을 까먹고 당근을 뽑아 먹는다. 그러다 맥그리거 아저씨와 마주치게 된 피터는 필사적으로 도망을 친다. 그물에 걸리고 말지만 기지를 발휘해 옷을 벗어 던지고 물통에 숨어 있다가 간신히 돌아온다.

『피터 래빗』 시리즈를 아름다운 동화나 그림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냉혹한 현실을 그려낸 책이고 아이들에게 교훈적 메시지도 강하다. 20세기 초 영국은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함으로부터 많이 벗어난 때는 아니었다. 하지만 작품의 시작은 ‘위로’였다.

1893년 스코틀랜드에 머물던 베아트릭스 포터(Beatrix Potter, 1866~1943)는 노엘이라는 아이에게 편지를 쓴다. 포터의 가정교사였던 애니 무어의 어린 아들이다. 포터는 그림 편지로 아픈 아이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노엘에게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어서 네 마리 토끼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했단다. 그 토끼들의 이름은 플롭시, 몹시, 코튼테일 그리고 피터야.”

베아트릭스는 벤저민이라는 토끼를 키우기도 했었고, 이 토끼를 모델 삼아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기도 했다. 1893년에는 피터라는 토끼를 키운다. 이 토끼는 베아트릭스 가족과 함께 스코틀랜드를 여행하기도 했다. 베아트릭스가 노엘에게 편지를 쓴 것도 여행 중의 일이었다.

출판사마다 출간 거절, 자비로 책 펴내
한 명의 아이를 위해 쓴 글은 1902년 『피터 래빗 이야기』로 출간되기에 이른다. 많은 출판사에서 번번이 거절당한 끝에 결국 자비를 털어 만든 첫 책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만든 250권이 2주 만에 동났다. 그러자 출판사 프레더릭 워른은 색을 칠한 컬러판을 내는 데 동의했다. 1902년에 나온 정식 컬러판은 선주문이 8000권에 달했다. 그리하여 1905년까지 그녀는 『피터 래빗 이야기』『다람쥐 넛킨 이야기』『벤저민 버니 이야기』『말썽꾸러기 쥐 두 마리 이야기』『파이와 파이 틀 이야기』 『골로스터의 재봉사』까지 여섯 권의 작은 그림책을 발표한다.

여기에는 워른 집안의 편집자 노먼 워른의 공로가 컸다. 워른은 포터가 5년간 글을 쓰고 책을 펴내는 것을 도와주었고, 이 둘은 점차 사랑에 빠지게 된다. 르네 젤위거가 주연을 맡은 전기 영화 ‘미스 포터’(Miss Potter·2006)는 이 무렵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뤘다.

당대의 풍속을 거르고 포터는 자신의 작품과 세계를 이해해 주는 남자를 선택한다. 그러나 약혼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워른은 급성백혈병으로 사망한다. 낙심한 그녀는 작품의 배경이자 마음의 안식을 얻었던 레이크 디스트릭트 지역에 있는 ‘힐탑’으로 이사한다. ‘미스 포터’는 포터가 이사를 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포터의 삶은 이곳에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데, 포터는 매매가 성사되기 전부터 힐탑에 머물면서 상실감을 달랠 수 있었다.

“돼지를 팔았다. 장사치들이 ‘헐값’이라고 부르는 가격에…이 일대 전역으로 내 돼지가 팔려갔다. 우리는 계속 예의주시하고 있다. 녀석들이 무럭무럭 자라준다면 우리는 분명 돼지로 이름을 얻게 될 것이다. 돼지로 얻는 명성이라니!”

농가의 일상을 담은 유머러스한 글을 보고 있으면, 자연의 치유력은 상실한 자의 마음을 친근하게 어루만져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자연의 힘을 믿었다.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열여섯 소녀 시절 가족과 함께 떠난 휴가지로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곳이다. 그렇게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피터 래빗이 활동하는 숲 속의 무대가 됐고, 연인이 떠난 이후에는 새로운 집필 장소가 됐다.

환경운동가이자 농부로 변신
포터는 이곳에서 무분별한 개발에 반대하고 자연 보호에 앞장서는 환경운동가이자 농부로 변신했다. 지역의 농장을 사들이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목초를 관리하고, 양을 돌보고, 심지어 양 품평회의 심사위원까지 하게 된다. 1920년대부터 이 지역을 개발하려는 시도가 늘어났고, 그런 한편으로 힐탑 근처를 순례하는 포터의 미국 독자들 역시 나날이 증가했다.

“‘피터 래빗’은 자신을 위해 구걸하는 게 아닙니다. 베아트릭스 포터는 거대한 건물과 도시의 시설이 들어와 황폐화될 위협에 직면한 윈더미어 선착장의 호숫가와 숲, 그리고 목초지를 구할 기금을 마련할 수 있기를 간절히 호소합니다. 수많은 다정하고 친절한 미국인들이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다녀가셨고, 몇몇 분은 피터 래빗에 대해 묻기도 했습니다. 그림에 사인을 해서 준다고 하면 기금 마련을 위해 1기니를 낼 사람이 있을까요?”

사람들은 성금을 내기 시작했다. 농장들이 매물로 나오자 포터는 협상을 시작했다. 자금은 전적으로 책을 팔아 충당했다. 19세기 말 설립된 자연과 사적의 보호단체 내셔널트러스트에서 기금을 마련하는 대로 부지의 절반을 협회에 팔기로 합의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그녀가 내셔널트러스트의 방향과 정책에 대해 냉정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녀의 노년은 조언자의 삶이었다. 자신의 땅을 내셔널트러스트 협회에 기증하면서 “원래 모습대로 보존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녀의 노력 덕분에 협회는 세계적인 환경운동의 메카가 됐다.

오늘날 이곳은 영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장소 중 하나가 됐다. 그것은 자연의 생생함 때문만은 아니다. 이곳을 배경으로 백 년 넘게 사랑을 받아 온 조끼 입은 피터 래빗이 탄생하고 성장한 장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연은 보존되어야 하지만, 신화가 될 때에야 비로소 굳건하게 지켜질 수 있다. 포터는 단순한 동화작가가 아니라 동화 같은 삶을 실천하고 만들어 갔던 살아있는 예술가였다.


이상용 영화평론가. KBS ‘즐거운 책 읽기’ 등에서 방송 활동을, CGV무비꼴라쥬에서 ‘씨네샹떼’ 강의를 하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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