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양 조화로 열매 맺었는데 … 왜 암은행만 쫓아내나 ”

중앙선데이 2014.11.30 00:59 403호 10면 지면보기
27일 밤 세상 밖으로 나온 나의 뿌리들. 20년을 살면서도 잘 뭉쳐 있었다. 속살을 내보인 나는 이 모습 그대로 트럭에 실려 김포로 옮겨졌다. 최정동 기자
서울 정동에 위치한 시청역 3번 출구. 서울시의회와 광화문 방면으로 가는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이다. 나는 3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길가에 놓여 있던 은행나무다. 10살 때 이곳으로 왔다. 나는 여름철 따사로운 햇살을 막는 역할도 했고, 가끔은 현수막을 거는 데 쓰이는 기둥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20년을 여기서 머물렀다. 서울시청 앞에서 벌어지던 시위도, 월드컵 응원의 현장도 다 지켜볼 수 있었다.

서울서 밀려나는 암은행나무의 넋두리

여러분은 나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바로 앞에 큰 플라타너스가 있고, 전봇대도 몇 개 놓여 있어서다. 요즘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사람도 없으니 4m 넘는 높이를 거슬러 내 얼굴을 올려다 본 이들도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노란 잎을 떨구면 그저 ‘가을이 왔나 보다’라며 세월의 흐름만 느꼈을지도 모른다. 늘 내 옆에서 손톱만 한 땅콩과자와 쥐포·오징어를 구워 팔던 아저씨가 나를 기억해줄지는 모르겠다.

여러분이 지금이라도 나를 보겠다며 3번 출구로 나와도 나는 이제 거기에 없다. 내가 있던 자리는 보도 블록으로 메워졌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기 사흘 전인 27일 밤, 나는 시청역 도로변에 있던 가로수 가운데 가장 먼저 자리를 떠났다. 가을마다 맺던 내 열매 때문이었다.

새 땅서도 살 만한 나무 골라 이식
지난달이었다. 길을 지나던 서울시 공무원 한 명이 “암은행나무를 수나무로 바꾼다더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생각해보면 시민들은 내 열매를 짓밟고는 악취가 난다며 불평했다. 열매를 주우려고 도로로 나가는 아주머니들 때문에 버스 기사들이 욕설을 내뱉던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지 나를 수나무로 바꾼다니…. 이야기를 듣던 다른 공무원이 내 줄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거 뽑아서 다른 데 심으면 적응 못해서 죽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서울시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박원순 시장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활동도 활발하게 하면서 소통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익히 들었다. 수많은 민원을 흘려들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지난달 28일 서울시청에 각 구의 조경 담당자들이 모여드는 걸 먼발치서 지켜봤다. 회의를 마친 몇 명이 길 건너 내 그늘 아래로 들어와 말을 나눴다. “서울 시내에 은행나무가 3만 그루다.” “세금도 어마어마하게 들 거다.” “그래서 결국 중구랑 송파구·강북구 이렇게 세 곳에서 일단 이식해본다는 것 아닌가.”

한 그루 파내는 데 70분 … 밤새 작업 이어져
이튿날부터 중구청 조경과에서 왔다갔다하며 내 줄기의 굵기도 쟀고, 잎이 언제 질지 가늠해보기도 했다. 민원이 유독 많은 버스정류장과 지하철역 출구 부근, 줄기 지름이 25㎝ 이하인 비교적 가느다란 은행나무 11그루를 선정했다고 했다. 굵기가 굵고 나이가 많은 은행나무들은 새 땅으로 가서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말도 들었다. 올해로 서른 살인 내가 제일 먼저 옮겨지는 ‘1번 나무’로 뽑혔다.

대입 수학능력시험일을 전후로 바람이 거셌다. 급격하게 기온도 낮아졌고 비도 왔다. 가지에 달려 있던 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작업 날짜가 정해졌고 그날이 왔다. 27일 밤 10시, 야간 작업이 시작됐다. 전기 톱이 나의 작은 가지를 잘라냈다. 발 밑으로 ‘마지막 잎새’가 달린 잔가지가 떨어졌다. 나는 튼튼한 몸체만 남기고 민숭민숭해졌다.

야광 옷을 입은 인부 넷이 자신의 무릎까지 흙을 팠다. 20년을 살았으니 내 세간도 얼마나 불었겠나. 아직 땅이 얼지 않았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인부들은 그동안 묵직하게 내 뿌리를 누르던 큰 돌을 들어냈다. 40분 넘게 파고 나니 뿌리의 윤곽이 드러났다. 인부들은 뿌리를 흙뭉치째 들어올려 거즈 천으로 싸고 단단한 고무줄로 묶었다.

소형 크레인이 와서 나를 들어 올렸다. 큰 트럭이 다가와 나를 실었다. 전깃줄에 걸려 몇 번 아찔하긴 했지만 순조롭게 일이 마무리됐다. 평균 1시간 30분이 걸린다는데 나는 1시간10분 만에 트럭에 실렸다. 인부들은 따뜻한 두유를 나눠 마시며 한기를 달랬다.

그렇게 밤새도록 작업이 이어졌다. 나를 기점으로 2번 출구와 서울시의회 앞에 있던 친구들이 모두 대머리가 된 채 트럭에 실렸다. 이 모든 작업을 하는 데 1800만원이 든다고 했다. 크레인 불빛 때문에 시청 일대가 대낮처럼 밝았다.

내 열매들도 안쓰럽다. 어렵사리 맺은 내 은행들을 두고 지난 20년 동안 참 말도 많았다. 농약이 많이 묻어 있어 먹으면 안 된다느니, 중금속이 검출됐다느니. 참고로 우리 은행나무들은 농약을 쓰지 않아도 병해충이 꼬이지 않을 정도로 독성이 강하다. 그래서 도심의 가로수로도 인기가 높았던 것이다. 그런 말도 있지 않나, 독성이 강하니 어른들도 은행은 10알 미만으로 먹으라고.

더구나 나는 서울시를 상징하는 나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시내에는 버드나무가 더 많았다고 한다. 한참 도시화가 진행되던 시기엔 플라타너스 등 성장이 빠른 나무들이 들어섰고, 이후 우리 은행나무들이 도심 곳곳을 차지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턴가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했다. 아마 사람들이 구두에 신경 쓰고 냄새에 민감해진 요 몇 년 새가 아닌가 싶다.

계속된 암은행나무의 수난
암나무라 수난을 당한 건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어떤 식물학자는 “이 나무가 암나무인지 알려면 줄기를 보면 된다”고도 했단다. 사람들이 은행을 따려고 마구 발로 차 줄기에 흠집이 있을 거란 얘기다. 생각해보니 한때는 내가 여러분의 건강식을 챙겨줬지만, 지금은 그 건강식이 발 밑에서 터져 여러분의 신발을 더럽히는 꼴이 됐다. 누군가는 “그러게 왜 가로수로 암나무를 심었느냐”고 하지만 수나무가 없었으면 나는 열매를 맺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게 왜 수나무를 근처에 심었나.

지금 나는 김포에 잘 도착했다. 밤새 30여㎞를 달려왔다. 이곳은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가식(假植) 시설이다. 저쪽엔 내 친구들도 있다. 2006년 서울 서소문동 일대에 있던 은행나무 동료들이다. 저 친구들도 열매와 잎이 너무 많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먼저 이곳에 왔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소나무들이 심어졌다.

이곳 땅은 비옥하다. 도시로부터 떨어져 공해도 덜하고, 밤엔 불빛도 없어 편히 쉬기도 좋다. 당분간은 내 열매를 가지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다. 잘 살아 남아 있다가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면 그리로 또 옮겨가 살게 될 거라고 들었다. 다음엔 예쁜 아이들이 뛰노는 학교 운동장으로 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곳에서는 열매를 맺어도 덜 미안하기를. 우리 암나무들이 서울시내에서 사라지면 시민 여러분은 가을이 오는 냄새마저 잊어버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유재연 기자 queen@joongang.co.kr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