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주얼경제사] 수백만 아일랜드인의 운명을 바꾼 ‘악마의 감자마름병’

중앙선데이 2014.11.30 02:29 403호 20면 지면보기
그림 1 어스킨 니콜 ‘밖으로’(1854). 남루한 옷차림의 사내가 담벼락에 있는 뉴욕행 여객선의 광고를 보는 모습.
화가 어스킨 니콜(Erskine Nicol)은 스코틀랜드 출신이지만 스무 살 때인 1845년부터 5년 동안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살았다. 이 기간은 아일랜드에 전례 없는 대기근이 발생해 엄청난 수의 사람이 고통을 겪던 때였다. 니콜은 이후 자신이 목격한 아일랜드인들의 고난을 화폭에 담았다.

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17> 감자 흉작이 초래한 대기근과 해외 이민

그림 1은 ‘밖으로(Outward Bound)’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벽보를 보면 우선 뉴욕이라는 지명이 눈에 들어온다. 그림의 주인공은 뉴욕으로 향하는 여객선의 광고를 살펴보고 있다. 오른편 배경에 보이는 건물은 더블린에 위치한 세관이다. 남자가 있는 곳은 바로 더블린의 부둣가다. 벽보를 자세히 보면 선박회사 이름이 ‘샴록라인(Shamrock Line)’임을 알 수 있다. 샴록은 클로버의 잔가지를 지칭하는데, 이것도 아일랜드와 관련이 깊다.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성패트릭(St Patrick)이 5세기에 대중에게 삼위일체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세 잎 클로버를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와 훗날 샴록은 아일랜드의 상징이 되었다.

고소득층은 밀빵, 저소득층은 감자
이제 그림의 맥락이 분명해졌다. 가난에 찌든 아일랜드 사내가 새 삶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민 갈지를 고민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었을까? 화가는 현실이 녹록지 않다는 점을 보이고 싶었는지 사내의 손에 주화 한 닢을 들려주었다. 낯선 이역만리로 떠나는 뱃삯을 마련하는 것조차 힘들 만큼 가난이 깊었다고 말하고자 했으리라.

이 시기에 아일랜드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야기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들여온 감자로부터 시작된다. 1570년께 유럽에 처음 들어온 감자는 곧 서유럽과 중유럽에 소개되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감자는 척박한 토양과 습한 기후에서도 잘 자랐고, 쟁기와 같은 농기구 없이 삽만 가지고도 경작이 가능했다. 장기간 보관하기도 쉬웠고 오븐이 없어도 쉽게 조리할 수 있었다. 영양학적 측면에서는 괴혈병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우유와 함께 섭취해 칼슘과 비타민A를 보충하면 영양상의 균형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장점들은 감자의 인기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천한 계층의 식량’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심지어 감자를 ‘악마의 식물’로 여기기도 했다. 감자는 표면이 거칠고 마맛자국 같은 홈이 나 있고 모양이 불규칙했다. 아무리 척박한 땅에서도 대단한 성장력과 번식력을 보였다. 이런 속성이 감자를 불경스럽고 위험한 작물로 보게 했다. 그래서 고소득층은 희고 고운 밀빵을 소비하고, 중소득층은 검은 호밀빵과 오트밀 죽을 찾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저소득층만 감자를 식량으로 삼는 계층 분화가 발생했다.

유럽에서 저소득층이 대표적으로 많았던 아일랜드에서 감자가 널리 퍼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아일랜드는 1801년부터 통합된 연합왕국(United Kingdom)의 일부로 통치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잉글랜드의 직간접적 영향하에 놓여 있었다. 지주들은 농민들에게 땅을 빌려주고 지대를 받아갔는데, 18세기를 지나면서 중개인(middleman)이 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중개인은 지주에게 고정된 지대를 내고 농지를 임차한 후 이를 작은 단위로 쪼개 농민들에게 높은 지대를 받고 재임대해 이득을 챙겼다. 대지주들은 중개인에게 경지 관리와 지대 수취를 일임하고, 자신이 소유한 경지를 거의 찾지 않는 사례가 늘어났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잉글랜드에 사는 부재지주(不在地主)였다, 농민들에게 부과되는 지대는 점점 높아졌고, 이를 납부하지 못한 농민은 땅에서 쫓겨났다.

이런 여건에 있었던 아일랜드인들에게 감자는 안성맞춤의 식량이었다. 아무 땅에서나 잘 자라고, 잦은 관리가 요구되지 않으며, 조리가 간편한 감자는 가난한 가정으로 파고들었다. 상당수의 아일랜드인은 봄에 텃밭에 감자를 심고 잉글랜드로 떠나 날품노동자로 일하다 가을에 돌아와 감자를 수확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집안 경제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1840년대에 아일랜드 인구의 40%가 감자에만 의존해 살았고, 한 명당 연평균 1t이 넘는 감자를 소비했다고 한다.

그림 2 로버트 시모어 ‘부재자’(1830).
전체 인구 10% 굶어 죽어
1830년에 발표된 그림 2는 아일랜드의 경제상황을 잘 보여준다. 로버트 시모어(Robert Seymour)는 ‘부재자’라는 제목의 이 작품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부재지주를 묘사했다. 음악과 음식이 넘치는 실내에 주인공 남자가 여인과 함께 앉아 있다. 창밖으로는 나폴리 항구와 베수비오 화산이 보인다. 해외에서 만끽하는 풍요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마음은 편치 않다. 아일랜드에서 굶어 죽어간 농민들의 환영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다. 베수비오 화산의 불기둥이 불길하게 느껴진다. 이렇듯 1845년 ‘감자기근’이 발생하기 이전에도 아일랜드인들은 만성적인 빈곤과 간헐적인 기근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림 3 조지 프레데릭 와츠 ‘아일랜드 기근’(1850).
1845년부터 유럽 전역에 감자마름병이 휘몰아쳤다. 아일랜드의 타격은 엄청났다. 병에 걸린 감자는 식물 전체가 검게 썩어 문드러졌고 그 자리에 곰팡이가 가득 피어났다. 이듬해에도, 그리고 그 이듬해에도 감자마름병은 맹위를 지속했다. 감자 생산이 격감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신음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양 부족으로 허약해진 몸속으로 콜레라와 발진티푸스가 침투했다. 사망자 수는 속절없이 늘어갔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에 숨진 인구가 무려 100만 명에 이른다고 추계한다. 전체 인구의 10%를 훨씬 넘는 수치였다. 조지 프레더릭 와츠(George Frederic Watts)의 그림 3은 절망과 비탄으로 가득했을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마냥 지켜볼 수밖에 없는 부모의 타 들어가는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하다.

대재앙에서 목숨 건진 사람들 미국으로
이 대재앙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영국 정부는 기근 초기에 즉각적으로 구호에 나서지 않았다. 식량 배급은 지연되었고, 공공취로사업은 성과가 미미했다. 무엇보다도 정부가 자유방임주의 정책을 완강하게 고수했다. 정부는 아일랜드산 농산품이 외부로 수출되는 것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감자 이외에 많은 작물이 재배되었지만 구매력을 갖지 못한 아일랜드인들은 식량이 외부로 반출되는 모습을 허탈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구호업무를 총괄하는 임무를 맡은 찰스 트레블리언(Charles Travelyan)은 기근이 나태한 아일랜드인들에게 교훈을 주려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발언했다. 역사적으로 세계의 수많은 기근 사례가 보여주듯이 아일랜드에서도 기근의 근본적 원인은 식량의 절대적 부족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에게 식량이 돌아가지 못하는 배분 시스템에 있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이들에게도 미래는 어두웠다. 많은 지주가 지대를 내지 못하는 농민들을 가차없이 추방했다. 그래야 납부할 세금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추방된 이들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로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났다. 더 멀리 미국과 캐나다·호주로 이민을 떠나는 숫자도 급증했다. 기근 기간에 연평균 25만 명에 이르는 엄청난 인구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대서양 횡단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이민선의 환경은 무척이나 열악해 ‘관선(棺船·coffin ship)’이라는 별명을 얻을 지경이었지만 다른 선택이 없는 이들로서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배를 탈 수밖에 없었다. 신세계 인구에서 아일랜드 출신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대량 이민의 결과였다.



송병건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제사회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세계경제사 들어서기』(2013), 『경제사:세계화와 세계경제의 역사』(2012),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2008) 등 경제사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