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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나는 김장 배추를 존경한다

중앙일보 2014.11.29 00:02 종합 34면 지면보기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지난 주말 김장을 했습니다. 마트에서 사온 배추 박스를 열었습니다. 소금물에 절인 배추는 풀이 확 죽어 있더군요. “나는 배추다!”라며 빳빳한 잎사귀를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배추는 양념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몸에서 물기부터 뺐습니다.



 물 빠진 배추를 옮기며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는 왜 김장 배추를 닮지 못하는 걸까.’ 어찌 보면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는 배추와 양념의 관계입니다. 빳빳하던 배추는 양념을 만나서 버무려지고, 발효되고, 숙성되면서 김치가 됩니다. 양념이 없다면 배추는 절대 김치가 될 수 없습니다. 늘 배추로만 머물 뿐입니다. 그러니 참 중요합니다. 배추가 양념을 보는 시각 말입니다. 여당이 야당을 보고, 진보가 보수를 보는 시각 말입니다. ‘내가 김치가 되기 위해선 저 양념이 꼭 필요하구나!’ 정치권의 배추들은 과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김장 양념을 만들면서 물었습니다.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는 왜 상대를 싫어할까. 심지어 적이라고 여길까.’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 그리고 현대사를 거치며 좌우 진영은 서로 상처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상처와 분노를 잊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게 아무는 걸 싫어합니다. 딱지가 앉을 만하면 떼버리고, 딱지가 앉을 만하면 떼버립니다. 끊임없이 ‘상처’를 재생산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정치권의 배추는 양념을 싫어합니다. 보수가 진보의 양념을 묻히고, 야당이 여당의 양념을 묻히는 걸 싫어합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봅니다. 매운 마늘, 톡 쏘는 생강, 짠 새우젓, 미나리와 쪽파에다 고춧가루까지. 하나같이 낯설고 겁이 나는 재료들입니다. 자칫하면 좌파의 배추, 우파의 배추로서 자기 정체성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두려워합니다.



 거실에 쪼그리고 앉아 배추를 양념에 치댔습니다. 잎사귀를 하나씩 들추며 뻘건 양념을 묻혔습니다. 제 손에 들린 겨울 배추는 겁내지 않더군요. 자신을 열고, 양념을 묻히고, 김장이란 거대한 화학작용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생각했습니다. 정치판의 배추는 겁을 내는데, 겨울 배추는 왜 두려움이 없을까.



 그건 ‘시야(視野)의 차이’였습니다. 좁은가, 아니면 넓은가. 시야가 좁으면 배추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시야가 넓어야 ‘배추 이후’가 보입니다. 배추가 김장을 거쳐 김치가 되는 게 보입니다. 좁은 시야로는 나의 세력, 나의 진영, 나의 정당만 보일 뿐입니다. 그걸 놓치면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고집스러운 보수, 타협 없는 진보가 됩니다.



 그런 배추는 버무림과 발효라는 숙성의 과정을 잘 모릅니다. 어쩌다 양념을 묻혀도 잎사귀에만 살짝 묻힐 뿐입니다. 겉절이 김치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정치판이 만들어내는 겉절이 김치에 정말이지 질렸습니다. 그들의 지향은 왜 ‘겉절이’에만 머무르는 걸까요. 거기에는 왜 ‘김장의 미학’이 없는 걸까요.



 결국 눈을 바꾸어야 합니다. 정치권의 배추가 양념을 대하는 눈. 그것부터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당에 야당은 양념입니다. 진보에 보수는 양념입니다. 양념이 없다면 버무림도 없고, 발효도 없고, 숙성도 없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배추의 울타리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차원을 뛰어넘는 맛을 내는 김치가 되질 못합니다.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가장 중요한 재료. 그게 상대방이란 양념입니다. 그러니 정치인들은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겉절이용 배추가 될 것인가, 아니면 김장용 배추가 될 것인가. 양념을 치대며 내내 들었던 ‘김장 배추의 법문’입니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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