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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직의 바둑 산책] 속기바둑 많아 … 기력 향상되나 조로 현상 올 수도

중앙일보 2014.11.27 00:06 종합 28면 지면보기
지난 8월 27일 중국 칭다오 샹그릴라 호텔에서 열린 삼성화재배 32강에서 박정환 9단(왼쪽)이 중국의 멍타이링(孟泰齡) 6단과 대국하고 있다. [사진 한국기원]


98국-. 한국 랭킹 1위 박정환(21) 9단이 올해 들어 둔 대국 숫자다. 무려 사흘에 한 판꼴로 바둑판과 마주앉았다. 프로야구 투수로 치면 사흘에 한 번 등판한 셈이다.

박정환 올해만 98국, 사흘에 한 판
긴장 지속되면 뇌활동 위축 우려
“1주일에 한 판 반 정도가 무난”



 박 9단뿐만 아니다. 랭킹 2~5위 프로기사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국이 놀랄 만큼 많다. 이세돌(31) 9단 87국, 김지석(25) 9단 72국, 강동윤(25) 9단 74국, 박영훈(29) 9단 64국을 기록했다. 이리 많이 두어도 될까. 20대 한창이라 해도 몸이 감당할 수 있을까. 애기가(愛棋家)들의 우려가 적지 않다.



 예전으로 돌아가보자. 50여 년 전인 1960년대 일본 명인전 도전기와 본선은 이틀걸이였다. 제한시간 10시간. 첫날은 오후 5시에 중단하지만 다음날은 밤을 밝혀서라도 끝장을 봤다. 새벽에 끝난 바둑이 적지 않았다. ‘바둑의 신’으로 불렸던 린하이펑(林海峰·72) 9단은 “대국 후엔 몸무게가 3㎏ 줄었다”고 술회했다. 당시 기사들은 대국 후 적어도 일주일은 푹 쉬어야 했고 많이 두어야 1년에 40국이었다. 몸과 정신을 소진시켰다.



 그동안 무엇이 달라졌을까. 24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 4층 기사실에서 프로기사들과 얘기를 나눠보았다. 기사들은 “많이 둬도 괜찮다. 둘 수만 있다면 더 많이 두고 싶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올해 64국을 마친 최정(18) 5단은 “더 많은 대국을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홍민표(30) 8단도 “성적이 좋아져서 많이 두어보는 게 소원이다. 이창호는 1년에 100국 넘을 때도 있었다”고 했다.



 대국 수가 급증한 가장 큰 요인은 속기바둑이 많아졌다는 데 있다. 요즘 모든 기사가 참가하는 국내 기전에서 제한시간 2시간, 3시간은 각각 하나밖에 없다. 나머지는 1시간이 대세다. 5~10분 속기 바둑도 3개다. 속기는 일단 체력소모가 적다. 이벤트 기전을 포함한 요즘 대국의 반(半)은 속기다.



 이상훈(41) 9단은 “세상이 변했다. 다들 많이 둔다. 공식 대국은 물론이고 대표팀에서도 두고 바둑리그에서도 둔다. 그러고도 다시 인터넷 바둑을 본다”며 “괜찮은 거 같다. 공부할 때는 많이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많다’ ‘적다’는 자의적인 판단일까. 기사들이 생각하는 적정 기준은 무엇일까. 기사들은 대체로 “일주일에 두 판이면 집중도가 떨어져 힘들다” “한 판이면 여유가 있다” “한 판 반 정도가 무난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대략 1년에 70국이 된다. 70국 정도는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는 얘기다.



 최명훈(39·9단) 국가대표팀 코치도 “예전에는 장고(長考) 바둑이 많았지만 잘 둘 때엔 1년에 70~80국씩 두었다. 다른 기사들도 그런 거 같다”고 기억했다.



 예전 기록을 짚어봤다. 최다 대국 수는 꾸준히 증가해왔다. <표 참조>



80년대는 60국 정도였지만 90년대에 들어와서는 요즘과 별로 차이가 없을 정도다. 91년 왕위전 예선 제한시간이 4시간일 때에도 정상급은 80국을 넘게 소화했다. 각자 4시간이면 살인적인 행군이다.



 기사들은 나이에 따른 집중력 약화 문제를 제기했다. 최 9단은 “대국만큼 기력 향상에 도움 주는 건 없지만 내 경험으로는 스물다섯 살이 경계였다”며 “스물다섯 살을 넘으면 대국 수를 조절해야 한다”고 했다. 서봉수(61) 9단도 늘 “집중할 대회를 골라야 한다. 아니면 조로(早老) 현상이 올 수 있다”고 경계했다. 긴장이 오래 지속되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뇌 스스로 둔감해진다는 지적이었다.



 신예들의 진입 장벽도 거론됐다. 요즘엔 바둑리그와 국가대표팀에 들어가야 바둑을 많이 둔다. 세계대회와 중국리그는 국내 기전보다 중시된다. 정상급 중심의 이벤트 대회도 많다. 신출내기가 들어가기 힘든 세상이다. 신예대회가 많아져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유창혁(48·9단) 국가대표팀 감독은 “굳이 신예대회만 따질 게 아니다. 바둑리그 2부 퓨처스리그를 보자. 중간 허리층 강자도 있지만 갓 입단한 초단들도 들어가 활약하고 있다”며 “배려는 필요하지만 신예와 정상급의 실력 차이가 많이 줄어들어 신예대회가 곧 배려는 아니다”고 주장했다.



 사실 입단자에게 한국은 중국보다 환경이 낫다. 중국은 랭킹이 높으면 예선 없이 바로 본선에 직행시키고 있다. 갓 입단한 기사는 랭킹이 없기에 불리하다. 시드 배정이 없지는 않지만 한국은 랭킹 1위와 100위의 차별이 거의 없다. 예전엔 단위에 따른 차별도 있었다. 고단자는 2차 예선부터, 저단자(초단~4단)는 1차 예선부터 출발했다.



 양재호(51·9단) 한국기원 사무총장은 “대국 기회는 중요하다. 삼성화재배와 LG배, 중국의 바이링배 등 세계대회 예선에도 초단들은 직접 출전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신예들에겐 높은 세계다. 3개였던 신예기전이 현재 하나다. 대국 기회를 늘려보겠다”고 말했다.



문용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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