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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 칼럼] 도서정가제는 독일까 약일까

중앙일보 2014.11.26 00:03 종합 35면 지면보기
노재현
중앙북스 대표
아직도 먼지가 자욱하다. 먼지가 가라앉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적어도 3개월은 지나야 희미하나마 시야가 확보되지 않을까. 제도의 잘잘못이 손에 잡히지 않을까. 지난 21일 시행된 새 도서정가제(출판문화산업진흥법 일부 개정법률안) 이야기다. 법 시행 하루 전인 20일엔 막판 사재기 소동으로 대형 온라인서점 홈페이지가 마비됐다. 덕분에 하위권 온라인서점·오픈마켓 상호가 포털 검색어 최상위권에 오르는 진기한 일도 벌어졌다.


사재기 바람 끝나고
긴장하며 떠는 출판계
“가격경쟁 아닌 가치경쟁”
방향 맞지만
관건은 역시 국민 독서율

 내 주변에도 어린이책이나 평소 소장하고 싶던 양서 위주로 수십만원어치를 사들였다는 이가 여럿이다. 출판계에는 도서정가제 전야제(?) 대박 스토리들이 나돌고 있다. Y출판사는 주력 상품인 교육도서 시리즈가 주문이 폭주하는 바람에 직원들이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S사의 전집물도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고 한다. 세상에. 무슨 골드바(gold bar)도 아니고, 책을 사재기 하다니.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나 싶지만 독(毒)이 묻은 파티는 짧게 끝나고 말았다. 앞으로 날아들 계산서를 출판계와 서적 유통업계가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다.



 바뀐 도서정가제는 종전에 19%까지 가능하던 도서 할인율을 15%로 줄이고, 사실상 모든 책에 정가제를 적용하는 게 골자다. 묵직한 책들을 펴내 양서로 인정받고 전국의 공공도서관에 깔리는 뿌듯함과 함께 매출에도 도움 받던 소수 출판사들은 이미 울상이다. 예산이 한정된 도서관으로서는 비싸진 책을 적게 구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네서점이 아닌 온라인서점을 위한 법”이라는 볼멘소리도 높다. 온라인서점은 무료배송이라는 자체 신공(神功) 외에 카드사와 제휴한 할인 혜택까지 베풀 수 있다. 따지고 보면 2002년 7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최초의 도서정가제법(출판 및 인쇄진흥법)이야말로 당시의 IT(정보기술) 붐 끝물을 타고 온라인서점을 파격적으로 우대한 조치였다. 이번 법안은 그나마 출판계가 적극 나섰고, 시행 직전 공청회를 여는 등 난리를 친 끝에 시행령이라도 일부 보완한 결과물이다. 그래도 “제도 곳곳에 빈틈이 있고 좋은 취지가 두루 공유되지 않을 위험을 안고 있는 게 사실”(윤철호 한국출판인회의 회장대행)이라는 우려가 크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M출판사는 새 정가제 시행 직전 특수를 노리고 온라인서점에서 정가 9800원짜리 책을 90% 할인해 980원에 팔았다. 종이값도 안 나오겠지만 재고를 떠안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21일이 되자 바뀐 법에 따라 10% 할인(판매가 8820원)에 포인트 적립 5%(490원)를 더해 소비자는 8330원에 사게 됐다. 여기까지는 동네서점(포인트나 경품을 준다면)과 같은 조건이다. 그러나 온라인서점에서는 다시 카드사 제휴혜택 3038원이 제공된다. 소비자는 최종적으로 5292원에 구입하는 셈이고, 게다가 발품을 팔지 않아도 공짜로 집에 배달되는 이점을 누린다. 온라인서점과 동네서점의 가격 차이(3038원)는 정가의 31%에 해당한다. 이 경쟁력을 동네서점이 따라잡을 수 있을까. 나아가 동네서점은 책을 들여오는 공급률(일종의 도매가격)에서도 불리하다. 더 비싸게 들여오기 때문이다. 책 판매가가 올랐으니 온라인 대형서점에 넘길 때의 공급률도 낮춰야 한다는 논의가 출판사들 간에 있지만 아직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다. 그만큼 대형서점은 힘이 세고, 그쪽도 최근 들어 매출이 지지부진이라며 우는 소리다.



 그러나 이 모든 논란에도 불구하고 나는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는 쪽이다. 사실 출판동네 바깥에서 도서정가제를 대하는 시각은 각자의 철학에 따라 온도차가 크다. 새 정가제에 따른 변화를 세 가지 시나리오로 나누어 2020년까지 7012억~2조4066억원의 경제적 효과를 거둘 것으로 추정하는 보고서(현대경제연구원)가 있는가 하면 “경쟁을 제한하여 소비자 편익 및 시장효율화를 충분히 성취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므로 소비자 보호 차원에서만 본다면 단계적으로 (정가제를) 폐지하고 문화적 가치는 시장왜곡을 최소화하는 직접 보조 형태로 전환하는 것이 옳을 수 있다”(한국개발연구원·KDI)는 주장도 있다. 그나마 영미권과 달리 우리나라가 독일·프랑스·일본처럼 정가제를 시행하는 나라라는 게 다행일 수도 있다.



 결국 칼자루를 쥔 사람은 이 글을 읽는 당신, 즉 독서인이자 책 소비자다. “이참에 출판계도 가격 할인으로 승부하던 낡은 방식에서 벗어나 가치 경쟁을 하자”(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는 충고는 백번 옳지만 최종 관건은 사람들이 책을 읽는가 안 읽는가이다. 도서정가제는 독일까, 약일까. 독도 약도 아닌, 물이다. 양이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되는 물 말이다.



노재현 중앙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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