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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모순 덩어리” 다양한 가면 쓰고 자기 앞의 생 풀어내

중앙선데이 2014.11.22 02:19 402호 14면 지면보기
훈장을 탄 프랑스의 전쟁 영웅이자 외교관이었으며 작가로 이름을 높인 로맹 가리(Romain Gary·1914~1980)는 요약되지 않는 삶을 살았다. 가장 큰 사건 중의 하나는 1975년에 일어났다. 『자기 앞의 생』으로 공쿠르상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로맹 가리는 56년에 『하늘의 뿌리』로 이미 공쿠르상을 받았었다. 공쿠르상은 규정상 한 작가에게 두 번 줄 수 없는데도 말이다.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5> ‘천의 얼굴’ 로맹 가리

진실은 5년 뒤 밝혀졌다. 로맹 가리는 80년 파리에서 권총을 입에 넣고 자살했다. 그리고 반년 뒤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 출간됐는데, 이 책은 에밀 아자르가 바로 로맹 가리이며 아자르라는 이름은 로맹 가리가 쓴 다섯 개의 필명 중 하나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 글이 출판될 즈음에는 어쩌면 이것은 우스꽝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점까지 충분히 감안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지금 후손 앞에서 나 자신을 밝히는 한, 이 글이 내 작품들 중, 그중에서도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네 편의 소설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게 될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가 가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세상에 대한 모순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로칼랭』을 완전히 끝낸 뒤, 나는 출판사에도 알리지 않고 가명으로 발표할 결심을 했다. 명성, 내 작품의 평가 기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내 얼굴’, 그리고 책의 본질 사이에는 모순이 많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미 두 번이나 가명을 쓴 적이 있었다.”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족집게 예언
이처럼 가면을 쓰며 살아가야 했던 것은 단순히 예술가로서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삶이 받아들여야 했던 근본적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로맹 가리는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배우 출신이었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폴란드를 거쳐 프랑스 남부 지역인 니스에 정착한다. 니스에 정착한 모자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는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에 상세히 묘사되고 있다. 이 작품은 자기 대신 아들을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위대한 예술가로 만들기 위해 홀몸으로, 온 마음을 다하여 후원한 한 여성에 대한 헌사이자,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담이다. 시장 사람들에게 대거리 질을 하던 어머니는 아들을 두고 호언장담을 한다. “더럽고 냄새 나는 속물들아! 감히 너희들이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줄이나 아는 게야? 내 아들은 프랑스 대사가 될 사람이야.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을 것이고, 위대한 극작가가 될 거란 말이야. 입센, 가브리엘 단눈치오가 될 거라고! 내 아들은!”

어머니의 ‘말’은 모두 ‘사실’이 됐다. 로맹 가리는 엑상프로방스대학과 파리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공군에 입대하여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게 된다. 그가 대위로 제대한 로렌 대대는 45년 5월 28일 훈장을 부여받는다. 이 부대는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3000번 이상의 출정으로 2500톤이 넘는 포탄을 퍼부었다. 로렌 대대의 최정예 대원 일흔다섯 명 가운데 네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그 네 명 가운데 하나가 로맹 가리였다.

작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35년에 쓴 단편 ‘소나기’를 ‘그랭그아르’에 발표하면서부터다. 어머니의 말처럼 입센 못지않은 유명한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한 작품은 훈장을 받은 해에 출간된 『유럽의 교육』. 이 작품의 수상과 함께 이등대사 서기관으로 프랑스 외무부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45년은 로맹 가리에게 어머니의 예언이 진정으로 실현된 해였다.

‘네 멋대로 해라’의 여배우 진 세버그와의 인연
어머니는 전쟁기간 동안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녀의 예언은 계속되었다. 『새벽의 약속』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또 하나의 문장이 있다. “가장 아름다운 사교계 여자들, 유명한 발레리나들, 프리마돈나들, 라셀이나 뒤즈나 가르보 같은 여자들, 바로 그들이 내가 운명적으로 차지할 여자들이라고 어머니는 생각했다. 나로 말하자면, 나도 몹시도 원하는 바였다.”

로맹 가리의 여성 편력은 유명하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인연은 미국 주재 프랑스대사로 로스앤젤레스에 갔을 때 여배우 진 세버그(Jean Seberg·1938~1979)와 만난 일이다. 미국보다 프랑스에서 더 인기가 많았던 진 세버그는 장뤼크 고다르의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의 여주인공이다. 그녀는 로맹 가리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로맹 가리는 진 세버그를 주인공 삼아 두 편의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하나는 자신의 유명한 단편을 영화로 옮긴 ‘새들의 페루에 가서 죽는다’였고, 다른 하나는 71년에 만든 ‘킬’이라는 작품이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두 번째 공쿠르상을 수상한 해에 로맹 가리의 나이는 예순한 살이었다. 이 무렵 로맹 가리는 진 세버그와 합의 이혼한 상태였고, 모든 일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다음해에 공쿠르상이 문제가 되었을 때 ‘아자르’로 알려진 나의 친척은 이미 유명해져 있었고, 내가 다시 공작을 시작했더라고 아무도 그 이유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상을 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행동에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진짜 이유는 한마디로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다.”

이렇게 로맹 가리는 공쿠르를 두 번 수상한 작가라는 신화를 남겼다. 이 결과의 책임을 작가에게 짊어지우는 것은 잔인한 일일 것이다. 그는 다양한 가면을 쓰고 이야기를 하는 타고난 예술가였다.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은 성인이 아니라 어린 소년 모모다. 아이는 42년에서 43년까지 폴란드의 숲에 숨어 살며 독일 점령군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그것은 끔찍하지만 동시에 희망을 찾는 일이었다.

로맹 가리가 자살을 한 해는 진 세버그가 자살한 1년 후의 일이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도 여러 말이 말았고, 로맹 가리 역시 세간의 말들에 대해 분노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는 침묵을 선택한다. 로맹 가리가 남긴 유서의 마지막 문장은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로 끝이 난다. 죽음을 통한 침묵은 수많은 작품과 말들을 남긴 세상을 향해 던져 둔 가장 완전한 문장이었다.


이상용 영화평론가. KBS ‘즐거운 책 읽기’ 등에서 방송 활동을, CGV무비꼴라쥬에서 ‘씨네샹떼’ 강의를 하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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