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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나 작품이나 자기 위치 잘 지켜야 기둥 안 흔들리죠

중앙선데이 2014.11.22 02:26 402호 17면 지면보기
이석준(왼쪽)과 이승주
연말 공연 시즌을 맞아 온갖 화려한 무대들이 유혹하는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묵직한 연극 한 편이 있다. ‘인형의 집’, ‘페르귄트’, ‘헤다 가블러’ 등으로 유명한 ‘현대극의 아버지’ 헨리크 입센(1828~1906)의 국내 초연작 ‘사회의 기둥들’(11월 30일까지 LG아트센터)이다. 1877년 쓰인 이 희곡은 사회변혁의 가치를 직설해 당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서양 연극사에 실질적인 근대극 시대를 열었지만, 웬일인지 지난 한 세기 동안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잊혀질 뻔한 ‘숨겨진 걸작’이다.

입센 희곡 ‘사회의 기둥들’ 국내 초연 … 배우 이석준과 이승주

무려 137년 전 작품이라 고루할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올해만 해도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줄리어스 시저’ ‘은밀한 기쁨’ ‘스테디 레인’ 등 화제작을 쏟아낸 연출가 김광보가 2014년의 대한민국을 제대로 조명했다. 박지일·유연수·정재은 등 출연진도 빛난다. 김광보 연출이 ‘20년 연극 인생 동안 만난 최고의 배우’로 엄선했다는 16명이다. 이중 삼각관계를 이루며 진보와 보수의 가치를 대변하고 있는 두 사람, 이석준(42)과 이승주(33)를 만났다.

둘은 재미난 조합이었다. ‘베르테르’ ‘아이다’ 등 뮤지컬 배우로 유명하고 TV드라마로도 친숙한 이석준은 ‘뮤지컬 이야기 쇼 이석준과 함께’ 공연을 10년째 진행하고 있을 만큼 끼가 넘치는 성격. 어떤 질문을 해도 재치있게 답했다. 반면 지난해 말 국립극단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로 주목받기 시작해 올해 ‘M.Butterfly’ ‘유리동물원’ 등 굵직한 작품에서 주연을 꿰찬 이승주는 댄디한 외모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 연극에서 깨달음을 찾는 구도자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서로에 대한 해석은 정반대였다. 이석준은 이승주가 ‘동물적인 감각의 연기자’라고 했고, 이승주에 의하면 이석준은 ‘철저히 분석적인 배우’란다.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에서 처음 봤는데, 신선했어요. 승주씨처럼 잘생긴 배우는 무대 위에서 룰을 지키게 돼 있거든요. 그런데 굉장히 동물적인 연기를 하는 거에요. 저는 어릴 때부터 배운 대로 텍스트를 분석해서 인물의 합당한 선을 찾아내는 스타일인데, 승주씨는 나름 분석도 하겠지만 도달하는 결론이 다른 것 같아요. 제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부분에 들어가는 게 부러울 정도죠.”(이석준, 이하 ‘석’)

“순간적인 감으로 연기하고, 거기 머무는 배우들이 많은데 형은 철저히 분석적이에요. 말 한마디에도 ‘왜 이 대사가 여기서 나가야 되나’는 의문을 제기하죠. 그런 것들이 빈틈없는 배우들은 또 그것만 하는데, 형은 무대 위에 올라가면 자기 걸로 만들어요. 자기화시키는 게 가장 어렵거든요. 보통 인물에 자기를 넣으려고 하지 새로 창조를 하기가 쉽지 않은데, ‘M.Butterfly’때도 저와 완전 다른 르네를 만드시더군요. 배우고 싶은 부분이에요.”(이승주, 이하 ‘승’)

두 사람은 올해 초 역시 김광보 연출의 ‘M.Butterfly’로 처음 만났다. 당시 주인공 ‘르네’ 역에 더블 캐스팅됐지만, 무대 위에서 직접 부딪치며 호흡을 맞추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동물적인 줄만 알았는데 엄청난 노력파더군요. 제일 당황스러웠던 게 리딩 첫날 대본을 외워오는 거에요. 상대배우에 대한 예의가 없는 거죠.(웃음) 어차피 자꾸 바뀌니까 처음부터 굳이 외울 필요는 없거든요.”(석)
“노력한다기보다 제 방식이에요. 텍스트를 먼저 통째로 외워놓으면 나중에 튜닝이 되는데, 연습하면서 조금씩 단단해지면 그게 안되거든요. 언어에 대한 집착이 좀 있긴 해요. 암기과목 교과서를 통째로 외우기도 했죠.”(승)

빈틈없는 성격에 완벽한 외모가 왠지 연극 배우 같지 않은 이승주는 알고 보니 KBS 공채탤런트 출신. 왜 연극을 하느냐고 물으니 “배우로서 추구하는 최종 목표를 위해 정도를 걷고 있다”고 답한다. “성의없는 대답 같지만 연극이 좋아서 해요. 연극은 발전할 시간을 주거든요. 두 시간짜리 희곡의 주인공이라고 해봤자 대사 몇백 마디 안 되는데, 그걸 두 달 이상 고민해서 쏟아내는 그런 호흡이 제게 맞아요. 영화나 방송은 제대로 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지금 이 작업이 만족스럽고 여기서 얻고 싶은 것이 무궁무진한데, 그게 다 채워지려면 지금은 연극만 하기에도 부족한 것 같아요.”

‘사회의 기둥들’은 1877년 발표되자마자 당시로서 엄청난 수치인 1만 부가 팔린 화제작이다. 노르웨이 해안가 소도시의 영주 베르니크(박지일 분)는 존경받는 지도자지만 사실 도시를 개발해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속물. 과거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덮어주고 떠난 처남 요한(이석준 분)이 돌아오자 수리가 덜 된 배에 요한을 태워 무리하게 출항시키려 하고, 철저한 보수파로 도시 개발에 반대하던 교사 뢰를룬(이승주 분)은 요한과 한 여자를 놓고 대립한다. 그런데 이야기가 놀랄 만큼 우리 현실과 유사하다. 우리가 ‘사회의 기둥’으로 믿고 있는 존재들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일까.

오래된 작품인데 지금 한국 사회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네요.
석: 주인공이 제일 많이 하는 대사가 ‘나는 이 사회의 공익을 위해서 그랬다’에요. 우리 정치가, 사회운동가들도 국민을 인질 삼은 듯한 말을 많이 하잖아요. 배나 철도 사건이 우리 사회와 겹치는 것보다 이들이 품고 있는 마음이 문제인 것 같아요. 상대를 위하는 척 자기 이익을 챙기는 마음이 너무 닮아있는 거죠.
승: 그 시대에 쓰인 작품이 우리 현실과 닿아 있다는 게 처음엔 굉장히 놀라웠는데, 생각해보니 이 작품은 백 년 후에도 놀라울 거 같아요. 권력을 가질수록 케케묵은 관습이나 위선에 빠질 수밖에 없고, 그런 인간의 모습은 영원히 반복될 테니까요.

요한은 희생양 같은 역할이라 할 말이 많을 것 같아요.
석: 이 작품은 반전투성이에요. 4막 끝까지 봐야 다 드러나죠. 요한도 희생양처럼 보이지만 위선적인 면이 있어요. 첫 리딩 때 번역자 김미혜 선생님이 하신 얘긴데, 이 작품에서 위선적이지 않은 인물은 없어요. 절절히 사랑하는 것도 자기를 먼저 사랑해야 사랑하는 사람을 갖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거니까. 그만큼 텍스트를 파고들수록 표현하기 애매한 인물이죠.

뢰를룬은 매우 보수적인 역할인데 공감이 잘 되나요.
승: 굉장히 가여운 인간이라 생각해요. 본인은 자신이 가여운 것조차 모를 정도로 위선적인 인물인데, 빠져서 보면 그 누구보다 가엾더라고요. 왜 그걸 깨닫지 못할까 싶고. 본인의 생각이 너무 단단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극단적인 인물이라 공감이라기보다 재밌게 접근할 수 있는 인물이죠. 요한이 정말 어려운 역할이에요. 여러 겹의 모습과 내적인 갈등이 깊은데 표현은 안 하니까. 뢰를룬은 너무나 확실한 생각이 있는 캐릭터인데 저와 닿지 않아 접근 방법을 고심하긴 했어요.
석: 거의 ‘이승주의 기둥들’을 보게 될 거에요. 캐릭터 완성까지 힘들어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웃기기 시작하는데…. 여태껏 진지한 모습은 간데없고 이 잘 생긴 배우가 망가지는 걸 보시게 될 겁니다. 연습할 때 제가 웃다가 연출님께 혼날 정도였어요. 어떻게 연기하면 진지한 캐릭터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모델이 될 것 같아요.

뢰를룬이 코믹 캐릭터가 될 줄 몰랐는데, 의도한 건가요?
석: 의도했겠죠. 의도 안 했으면 미친 놈!(웃음)
승: 희곡 상에 그려진 인물이 저와 괴리가 너무 커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지금도 고민이 많습니다.

인지도 있는 배우 16명이 한 무대에 서니 그 누구도 튀기 어려울 것 같아요.
석: 근래 이런 작은 분량으로 뭘 해 본적이 없거든요. 인물 만들다 멘붕에 빠진 게, 배역별 서브 텍스트가 정말 깊고 큰 데 그걸 담아내야 하는 대사가 너무 적고 등장 시간도 적어요. 억울하게 당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뒤에 품은 게 많은데 몇 마디 대사 안에 실망, 의심, 불안을 다 보여줘야 하죠. 그런 걸 각자가 다 갖고 있고, 이런 인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부딪쳐야 하니 혼란스럽기도 해요. 그런데 정말 좋은 배우들이 모여 ‘아’하면 ‘어’로 받아주는 묘미가 있네요.
승: 이런 분들과 한 무대에서 호흡하는 자체가 영광입니다. 그 속에서 제가 보여드려야 하는 부분이 있는 건데, 저를 보고 뭔가 생각하게 해드리고 싶어요.

결국 우리가 믿는 ‘사회의 기둥’들이 의심스럽단 얘긴데, 그럼 진짜 기둥은 누구일까요.
석: 기둥이 기둥 역할을 못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 같아요.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구축하는 정계, 재계, 언론 등이 기둥 역할을 제대로 못하니 137년이 흐른 뒤에도 똑같은 문제가 벌어지는 것이겠죠. 사회를 위해 전부를 내놓는 건 항상 떡볶이 할머니 아닌가요. 그런 걸 보면 기둥 위치가 잘못된 것 아닌가 생각을 해요.
승: 개개인의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 모든 사람들이 기둥이겠죠. 정치인은 정치에, 의사는 치료에 전념하면 되는데 그렇게 못해서 기둥이 흔들리고 사회가 휘청거리는 것 같아요. 우리 작품도 참여하는 모든 분들이 기둥인데, 각자 잘 해내고 있어서 다행이에요.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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