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할아버지가 쓰다 손자에게 줘도 ‘신상’ 같은 존재감

중앙선데이 2014.11.22 02:46 402호 22면 지면보기
뮌헨에 있는 국립독일박물관을 돌아본 적 있다. 잔뜩 주눅 들 수밖에 없었다. 한 나라의 과학 수준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규모와 내용의 압도감 때문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전시품은 독일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방향을 제시한다.

윤광준의 新 생활명품 <6> 리모와 캐리어

항공기 관련 전시 부스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독일 항공기술을 이끌었던 인물 후고 융커스(Hugo Junkers·1859∼1935) 박사가 만든 융커스 전투기다. 당시의 첨단소재 두랄루민으로 만든 동체는 세월의 오염을 묻히고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자체 강성을 보완하기 위해 굴곡 처리된 직선의 간격과 폭, 도장하지 않은 알루미늄의 금속광택은 조형성 넘치는 대형 오브제 같았다. 폭탄을 싣고 전장을 향해 날아가는 전투기의 속성과 재질의 아름다움은 서로 다투지 않았다. 본질과 기능이 곧 디자인으로 완성된 묘한 상징의 아이러니 앞에서 혼자 감탄을 연발했다.

청년시절 전투 경찰을 자원해 배속받은 첫 근무지는 김포공항이었다. 오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군 생활을 했다. 1970년대 말 공항의 모습을 선명히 기억한다. 멋진 제복을 입은 외국인 조종사들에게 보낸 선망의 눈초리를 부정하지 않겠다. 훤칠한 키에 영화배우 같은 용모의 수컷들에게 이상한 열등감마저 들었다.

전투기 동체에서 따온 굴곡진 직선 이미지
그들 가운데 유독 ‘루프트한자’의 기장들이 눈에 띈다. 견고하고 야무지게 보이는 알루미늄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모습은 남다르게 보였다. 온 세상을 누볐던 캐리어는 빛바랜 금속광채마저 세월의 관록으로 바뀐 리모와(RIMOWA)다.

이후 돌아다니는 직업을 가진 덕분에 해외여행은 꿈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허겁지겁 여러 공항을 헤집으며 일과 놀이가 구분되지 않는 작업으로 살게 된다. 난 전화 한 통으로 어디라도 달려가야 하는 ‘콜 보이’, 아니 프리랜서 작가다. 공항을 제집마냥 여겨야 하는 팔자가 나쁘지 않다. 한 때 선망의 대상이던 루프트한자의 기장과 만나도 주눅 들지 않는다. 그토록 멋지게 보였던 그들의 캐리어보다 큼직한 리모와가 내게도 있다. 찌질한 자부심이라도 키워야 세상사는 일이 덜 억울하다.

듬직한 리모와 캐리어 표면의 굴곡진 직선의 이미지는 융커스 전투기 동체에서 따왔다. 과거의 유물이 된 아름다운 비행기는 1950년 캐리어로 현신해 생명을 이어간다. 비행기나 캐리어나 온 세상을 떠돌긴 마찬가지다. 인터내셔널 제트족의 듬직한 장비가 된 리모와는 속성의 인자를 기막히게 타고난 셈이다. 독일박물관에서 융커스 전투기 실물을 보길 잘했다. 과거의 전통이 리모와 캐리어로 어떻게 변용되는지 확인했기 때문이다. 제 것의 자부심이 없다면 어림도 없다. 과거가 부끄러운 이는 선조의 자산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법이다.

리벳 마무리는 지금도 장인이 망치질
지금 보면 리모와는 새로울 것도 없는 알루미늄 소재의 캐리어다. 과연 그럴까. 과거로 돌아가 보자. 두랄루민은 당시의 최첨단 소재였다. 가방은 가죽과 천 같은 익숙한 소재로 만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독일이라 해서 다르지 않았다. 지금으로 치면 듣도 보도 못한 소재가 3D 프린터로 찍혀져 캐리어로 됐다는 거다.

어느 시대나 호불호의 기준이 있게 마련이다. 처음부터 순조로웠을 리 없다. 첨단소재의 가능성을 확신한 리모와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주장은 주변의 인정으로 힘을 얻고 가치가 확산되면 시대의 기준으로 바뀐다. 확신이 바뀌면 인정도 없다.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겠다는 리모와 주재자의 우직함이 결국 승리한다.

당시에 퀄른에서 만든 리모와 캐리어는 지금까지 그 원형을 지켜오고 있다. 복잡하게 섞여 있는 공항의 짐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리모와는 눈에 쉽게 띈다. 색깔과 재질의 독특함 때문이 아니다. 알록달록한 캐리어 패션의 화려함 속에서도 밀리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것의 묵직한 존재감은 그저 그런 시대의 경박함을 압도한다. 공방의 장인들은 여전히 리벳을 망치로 두드려 박아 접합부를 마무리한다. 보이지 않는 부분의 완벽한 체결을 위해 리벳의 위치가 약간씩 다르다. 기계로 찍어내면 혹시 빗겨날지 모르는 우려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달되지 않는 완벽의 가치는 세월을 통해 입증된다. 공유의 방법은 철저히 우회적이다.

그동안 꽤 많은 캐리어를 갈아치웠다. 만든 이의 메시지 대신 기능과 어설픈 합리를 선택한 낭비의 과정이다. 리모와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사용자의 온 역사를 담아도 부서지지 않는 견고함에서 나온다. 나의 리모와는 앞으로 할 여행을 함께하며 죽음마저 지켜볼지 모른다.

질 좋은 재료가 금속 광채의 비결
튼튼하고 강인해 보이는 리모와의 느낌은 알루미늄 합금 품질이 바탕이다. 독일의 앞선 재료공학기술을 배경으로 만들어지는 질 좋은 두랄루민은 정평 있다. 오디오를 해봐서 안다. 금속의 질감과 광채의 깊이란 근본 재질의 밀도가 뒷받침되어야 나온다는 사실을. 재료의 속성 파악은 전문 영역의 비교를 통하지 않으면 쉽게 알기 어렵다. 세월의 더께를 뒤집어쓰고도 추해지지 않는 리모와의 금속광채는 질 좋은 재료가 감추고 있는 비밀이다.

리모와의 기품은 낡을수록 깊이를 더해간다. 표면의 금속광택이 한숨 죽어 내부로 머금은 은은함을 풍긴다면 최고조의 아름다움이다. 여러 나라에서 보았던 낡은 리모와 캐리어의 자태는 이상하리만큼 쓰는 사람의 인상을 닮았다.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 신사가 풍기는 중후한 세련됨과 일치한다고나 할까. 캐리어의 이력이 사용자의 인생처럼 느껴진다. 군데군데 찌그러진 흔적은 지난 세월의 훈장처럼 보인다. 이야기가 담기지 않은 사물은 절대로 은은한 광채를 뿜어내지 못한다.

한 해 전 친구 김정운과 베를린에서 리모와 ‘루프트한자’ 버전을 찾아 돌아다녔다. 루프트한자항공 마크가 박힌 스페셜 에디션 캐리어는 국내에서 구하기 어렵다. 친구는 입에 침 튀기며 리모와 예찬론을 펼친 나의 속사정을 모를 것이다. 발품 팔아 산 김정운의 리모와 ‘루프트한자’ 버전은 수많은 캐리어를 제치고 현역으로 활약한다. 엊그제도 리모와 캐리어를 끌고 오사카에서 날아왔다. 천여 명의 청중 앞에서 강연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야기는 애플 노트북에서 끌어냈고 그를 실어온 캐리어는 리모와 아니던가. 결국 리모와 안에 한 인간의 인생이 담긴 셈이다. 베를린 이후의 행적을 나는 안다. 자료 준비를 위해 여러 공항을 전전했던 분주함이 리모와에겐 영광으로 비쳐졌을지 모를 일이다.


윤광준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즐거운 삶의 바탕
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