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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형이라고 해서 A형처럼 살았다 그런데 O형이라니

중앙선데이 2014.11.22 03:39 402호 34면 지면보기
만나기만 하면 “혈액형이 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상대가 A형이라 대답할 때 “그래 A형이라서 나랑 잘 맞는구나”해주면 다행이지만 “나는 A형이랑은 정말 안 맞아”라며 쌀쌀한 표정을 짓는 사람 앞에서는 난감해진다. 내 몸에 흐르는 피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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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형 남자’에 대한 영화나 속설, ‘혈액형에 관한 간단한 고찰’이라는 웹툰이 큰 인기를 얻기도 했듯, 사람들을 어떤 유형에 맞춰 들여다 보는 일은 아무리 무시하고 싶어도 너무 재미있다. 혈액형, 탄생 별자리, 태어난 해의 띠…. 분명 한 카테고리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고, 나도 모르게 몸에 익숙해진 그것들을 예리하게 집어낼 때 “맞어 맞어”하면서 큭큭대게 된다. 어렸을 땐 나도 어김없이 혈액형을 물어보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이를 낳기 위해 병원에서 혈액형 검사를 하는 순간, 믿음은 무너졌다. 이십 몇 년 동안 A형이라고 알고 살았는데, 갑자기 O형이라는 것이다. 초등학교부터 12년 썼던 건강기록부에는 분명 A형이었는데, 피가 바뀌는 수도 있나. 여학생 시절 예쁜 일기장 뒤에 적혀 있던 혈액형별 성격 설명 때문에 ‘근심 걱정이 많고 타인의 단점을 발견하는 능력이 뛰어난 완벽주의자’로 맞춰서 소심하고 꼼꼼한 투덜이로 살아왔는데. 그와는 정반대 같은 ‘승부욕이 뛰어나고 개그 본능이 있으며 어디서든 대장노릇을 하려한다’는 O형이라고?

그것이 초등학교 선생님의 사소한 기록 실수였든 비과학적 혈액검사의 결과였든 아무튼 이후 O형의 전형적인 성격에 맞춰서 또 이십 여 년을 살아봤다. 그랬더니 오늘날엔 ‘술자리에서 승부욕을 발휘해 가장 먼저 취해서 가장 큰 소리로 타인의 단점을 발견해 개그로 만들어 떠든 뒤 뒷날 소심하게 후회하며 걱정하는’ 양쪽의 성격이 합쳐진 이상한 사람이 됐다. 사람의 성격이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혈액형도, 혈액형을 물어보는 사람들도 그다지 신뢰하지 않게 됐다.

비교적 내 맘에 들었던 MBTI 유형분류도 그렇다. INFP 잔다르크형이라고 대부분 나오지만 내가 생각해 봐도 혼자 있을 땐 I(내향성)인게 맞지만 술자리에만 나오면 대한민국 상위 1% 외향적인 E 타입이다.

술 이야기가 나온 김에 술로 판단해보는 성격마저 와인과 소주와 맥주를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보면 도무지 내가 어떤 성격인지 나도 모르게 된다. 아이폰과 안드로이드 폰 사용자의 차이점을 조사한 리서치 회사의 결과를 보면 평생 아이폰 사용자여야 딱 맞는데 알뜰한 주부라 공짜폰만 찾다 보니 내 손에는 늘 안드로이드 폰만 있다.

무언가를 통해서 그 사람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면, 그래서 나와 딱 맞는 사람을 찾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 보는 창을 가지고 싶다는 욕심 때문인지 우리는 자꾸만 사람들을 틀 속에 넣어 분류한다. 나도 남자를 볼 때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미술 혹은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 혹은 요리를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나누고 내가 가진 편견을 쏟아 부어 그 사람에 대한 사소한 고정관념을 순식간에 쌓아 판단 잣대로 활용한다.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싸구려 소설을 쓴다면 그 첫 문단은 “A형에 토끼띠, 처녀자리, 전형적인 INFP였고 데킬라를 마시는 사람이었다”라는 식으로 주인공 캐릭터를 설명할지도 모른다. 빅 데이터 분석 기술이 점점 발전하게 되면 아마도 갖가지 표지를 통해 인간의 성격을 정확하게 유형화해 갈 것이다.

하지만 위대한 소설가들이 눈 하나, 콧수염의 모습, 그리고 그것을 움찔거리는 모습을 묘사할 지언정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유형화해서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아무리 많은 공통점과 유형을 공유한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과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만의 우주를 내 몸속에 간직한, 너와 아무리 비슷해도 같아질 수 없는 나일 뿐이다.


이윤정 칼럼니스트. 일간지 기자 출신으로 대중문화와 미디어에 관한 비평 활동을 하고 있으며 중앙SUNDAY와 창간부터 인연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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