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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취지 변질 … 수능 무력화돼야 학생·교육 살아난다”

중앙선데이 2014.11.23 00:05 402호 3면 지면보기
박도순 고려대 명예교수가 지난 19일 경기도 분당의 자택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의 문제점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수능 때문에 온통 난리다. 지난해에 세계지리 문항 출제 오류로 인해 손해본 학생들에 대한 구제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올해는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문제가 오류 논란을 빚고 있다. 영어·수학시험이 너무 쉬워 변별력이 없다는 지적도 쏟아졌다. ‘이런 수능을 계속 치러야 하나’라는 탄식도 나온다.

‘수능 설계자’ 박도순 교수가 말하는 요즘 수능의 문제점

그래서 수능 개발자인 박도순(72) 고려대 교육학과 명예교수를 만났다. 그는 1980년대 후반에 수능을 설계했고, 93년의 시행을 주도했다. 이후에도 초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을 맡는 등 꾸준히 수능에 관여해 왔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는 수능의 본명도 그가 붙여 줬다. 교육계에서는 ‘수능의 아버지’라고도 부른다.

그는 “입시에서 차지하는 수능의 역할을 최대한 줄여야 학생과 교육이 산다”고 주장했다. “수능 무력화가 필요하다. 극단적으로는 수능이 사라져도 된다”고 말했다. 그는 왜 ‘자식’을 버릴 마음까지 먹게 됐을까. 수능과 입시에 대한 그의 주장을 8개 항목으로 정리해 봤다.

① 교육계 이기주의 탓에 변질 시작
박 교수에 따르면 수능 형식의 시험에 대한 논의는 87년 전두환 정권 말기 때 암기식 교육을 없애자는 뜻에서 시작됐다. 이후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통령 자문기관으로 교육개혁심의회가 구성돼 준비가 본격화됐다. 당시 그와 계명대 김영채 교수가 미국의 대학입학자격시험(SAT)과 유사한 ‘대학적성고사’를 제안했다. 그리고 90년에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이름이 정해졌다.

“대학 공부에 필요한 능력을 알아본다는 취지의 시험이기 때문에 최초의 의도는 간단했다. 교수 말을 알아듣는 능력이 중요하니까 언어시험을, 논리적 사고가 필요하니까 수리력을 측정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언어와 수리 두 영역으로 구성됐다. 그런데 당장 과학계에서 집단 반발을 했다. 과학 진흥을 외치면서 어떻게 과학을 빼놓느냐는 것이었다. 교육부 장관이 무마하려 했는데 통하지 않았다. 그러자 노태우 대통령이 한번 넣어 보라고 했다. 그래서 탐구영역이 생겨났다. 그 다음에는 사회과목 관련 교사·교수가, 또 영어 분야가 들고 일어났다.” 박 교수의 회고다. 수능 변질의 시작이었다.

수능은 ‘탈교과’ 문제로 암기된 지식이 아닌 사고력을 측정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초기에는 탈교과적·통합교과적 문제가 많이 출제됐다. 그런데 점차 사회·과학 등의 각 교과 해당 교수나 교사가 자신들 영역의 문제가 더 많이 나오도록 정치권과 교육 당국을 압박하는 ‘교과 이기주의’가 횡행했다. 그 결과 시험 내용은 학력고사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형태로 점점 변해 갔다.

② ‘EBS 연계’ 출제가 수능 완전히 망쳐
“수능의 성격을 가장 많이 바꾼 것은 노무현 대통령 때의 EBS 연계 출제 결정이다. 학습환경이 좋지 않은 지역계층의 학생들에게 공부에 도움을 주고 학부모들의 학습참고서 구입비용을 줄여 준다는 의도였다. 내가 엄청나게 반대했는데, 청와대와 교육부를 이길 수 없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연계’의 의미는 처음부터 EBS 교재 문제를 거의 베껴 내는 것을 말했다. 그는 “평가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가르친 내용을 그대로 문제로 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출제하면 암기가 가장 효과적 방법이다. EBS 연계 출제가 도입되면서 통합교과형 문제는 다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요즘 수능시험 공부는 EBS 교재 달달 외우는 게 대세다.

③ 현 시스템으론 출제 오류 불가피
박 교수는 “현재의 출제방식으로는 문제의 오류를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출제위원들이 한 달간 합숙하면서 문제를 내지만 실제로 문제를 만드는 시간은 일주일 정도에 불과하다는 게 주요 이유다. 인쇄에 소요되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일주일 안에 기존에 나온 문제, 또 합숙기간 동안 학원 등에서 치른 시험에 나온 문제들을 피해 출제해야 하기 때문에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출제위원으로 가장 적합한 사람은 고3 교사다. 그런데 학교에서 보내지를 않는다. 그는 “누가 문제를 낼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④‘문제은행’ 도입은 비현실적
“수능 문제를 어떻게 낼지를 먼저 확고히 정하지 않으면 문제은행을 만들 수 없다. 통합교과형 문제를 만들어 놓아야 하는지, 교과 중심적 문제를 만들어 놓아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쉽게 말해 교과서 위주로 내야 하는지, 교과서에서 벗어나 내야 하는지를 지금 그 누구도 정할 수 없는 상태다.” 박 교수의 진단이다. 교육계의 견해도 비슷하다. 정부가 방향을 정한다 해도 정권이 바뀌어 다시 방향이 달라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문제은행이 정착되기 힘들다고 본다.

⑤ 수능 ±10점 차이까지는 통계상 무의미
박 교수는 현재 400점 만점 수능의 측정 오차를 ±10점으로 추정했다. “여러 차례의 실험 과정을 거쳐 설계한 지능검사의 측정 오차가 ±5점이다. 수능은 정교함이 훨씬 떨어지기 때문에 두 배 정도의 오차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까 통계적으로는 수능 380점과 390점은 유의미한 차이가 아니다. 점수의 차이일 뿐이지 능력의 차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의 말대로라면 수능 점수 몇 점 차이로 대학 입시에서 낙방한 수험생이 불합격의 합리적 근거를 대라며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한다면 승소할 가능성이 있다. “점수는 객관적이고 공정하다는 건 신화에 불과하다.” 통계학자나 평가 전문가들은 다 알고 있다는, 그가 말하는 진실이다.

⑥ 영역별 5등급제 평가가 적당
박 교수는 수능은 영역별 5등급제로 평가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정부의 안병영 교육부 장관 때 나는 5등급제를, 그는 9등급제를 고집했다. 9등급은 돼야 변별력을 갖춘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학에서 수능을 입시의 주요 기준으로 삼지 않게 하려면 등급을 크게 묶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장관의 뜻대로 9등급이 됐다.” 박 교수의 말처럼 수능이 5등급제가 되면 상위 20%에서는 변별력을 갖기 힘들기 때문에 주요 대학들이 이를 입학사정의 준거로 좀처럼 사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5등급제는 ‘수능 무력화’의 핵심 수단인 셈이다.

“대학이 학생들의 수능 성적을 보려는 이유는 이것 말고는 지원자가 전국 수험생 중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볼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전국 학생을 서열화해 등수를 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얘기했듯이 그 서열이라는 게 상당히 비과학적·비합리적이다. 수능을 신줏단지처럼 모실 이유가 없다.” 전국 서열 상위권 학생을 입학시키는 것을 입시전략의 성패 기준으로 여기는 대학이 우선 변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⑦ 입시는 대학 자율에 맡겨야
그는 “대학 입시는 각 학교에 다 넘기고, 정부는 학생부나 수능 등의 자료를 제공하고 전형 비리를 감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학에 입시를 맡기면 본고사 시절처럼 어려운 문제가 출제돼 과외를 부추기게 될 우려를 언급하자 “본고사의 부작용과 본고사 금지 부작용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심각한 것인지 판단하기는 힘들다. 시험이 쉽다고 과외를 안 하는 것도 아니다. 쉬우면 시험에서 실수를 안 하겠다는 이유로 과외를 받는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대학 신입생 선발방법 중에서는 학생부 평가와 면접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얘기했다. “학생부 기록과 자기소개서 내용이 허위로 또는 부풀려져 엉터리로 작성돼 공정성과 객관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도 많지만 면접관이 10분만 얘기해 보면 진위를 가릴 수 있다. 대학이 게을러서 제대로 거르는 작업을 열심히 안 할 뿐이다.”

⑧ 입시 개선 추진할 국가위원회 필요
그는 “지금의 교육부나 청와대 등 정부 어디에서도 입시제도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고 걱정했다. 그는 국가적인 위원회를 만들어 최소한 10년간은 정권의 성향에 따라 틀을 깨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입시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수십 년간 사회불평등 완화, 사교육 해소, 고교 정상화, 대학 경쟁력 강화 등 다양한 정치적 구호에 휘둘려 온 입시제도를 이제는 ‘어떻게 하면 미래 세대에게 의미 있는 교육을 하느냐’에 맞춰 재정비해야 한다.” 그가 거듭 강조했다. 


박도순 1942년 충북 청주 출생. 청주고, 고려대 졸업. 미국 피츠버그대 박사.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 교육학회장 역임.


이상언 기자 joonn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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