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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가 만난 사람] “불투명한 국제경제 협약이 민주주의 위협하고 있다”

중앙선데이 2014.11.23 00:32 402호 8면 지면보기
지제크는 런던이나 파리에 가서도 비빔밥을 찾는다. 지제크가 한국인을 좋아하는 이유는, 겉과 속이 같고, 예절 바르고 따뜻하며 겸허하기 때문이다. [중앙포토]
한국에 대해 호의적인 해외 지식인·정치인들을 보통 ‘지한파(知韓派)’라 부른다. 더 나아가 ‘친한파(親韓派)’라 불러도 무방한 인물이 있다. 세계적인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65)다.

 지제크는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가 2012년 선정한 ‘100대 글로벌 사상가’다. ‘문화 이론의 엘비스 프레슬리’라 불린다. 호감은 쌍방이기 마련이다. 지제크가 한국을 좋아하니 우리 독자들도 그를 좋아한다. 서점에 가면 지제크와 관련된 책들이 63종이나 있다.

 전 세계 차원에서는 왜 그토록 인기가 드높을까. 어쩌면 지제크가 소련·동구권이 망한 후 ‘마르크스주의의 목소리’를 상당 부분 대변하기 때문이다. 냉전 시기에는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의회민주주의·베버주의(Weberianism) 등으로 구성되는 비(非)마르크스주의가 사상의 양대 산맥이었다. 지금 마르크스주의는 ‘소수 의견’에 불과하다. 적어도 가끔은 소수 의견에 경청할 필요가 있다. 지제크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다음은 인터뷰 요지.

『정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2014)의 표지.
 -요즘 세계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부채의 종언’이 필요한 시대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를 꿈꿨다. 민주주의적 자본주의가 역사의 최종 공식이라는 관념이다. 이 모델로 전 인류를 설득시키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관점이다.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는 사실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적합한 정치 질서는 권위주의라는 점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혼’은 영원할 것 같았지만 이 결합은 서서히 붕괴하고 있다.
 특히 강대국들은 국민 모르게 비밀스러운 협상 과정으로 무역 협정뿐만 아니라 돈과 정보, 서비스의 흐름을 규율할 협정을 맺고 있다. 투명성이 사라지고 있다. 국내에서 아무리 민주적인 과정으로 지도자들을 선출해도 지도자들은 국제 협정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민주적인 토론이 살아 있다.
 “서구 민주국가들은 낙태 권리라든가 동성 결혼에 대해 정치 토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결정은 비밀리에 행사되고 있다. 시민은 정보가 없다. 개인 차원에서는 자유가 있다. 우리는 일자리나 읽고 싶은 책, 여행지를 자유롭게 선택한다. 섹스도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한다. 하지만 내 자유를 규정하는 사회 제도는 점점 더 비민주적으로 결정되고 있다. 이런 성향은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비관적이다.”

철학자 소명은 해답 제시 아닌 문제 제기
-공산주의는 부의 창출과 민주주의 양면에서 실패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공산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최대의 윤리적·경제적·정치적 실패 사례 중 하나다. 20세기식 공산주의가 부활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21세기 레닌’이나 공산당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이미 끝난 일이다.
 중국이나 베트남 공산당만 해도 훌륭한 자본주의 규제 기관으로 기능하고 있다. 가장 역동적인 자본주의를 공산당이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게 최대의 아이러니다.”

 -그렇다면 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가.
 “나는 자본주의를 비판만 하는 게 아니다.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생산적이고 역동적인 경제 질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환경 재앙을 막는 문제뿐만 아니라 시장의 문제 그 자체를 해결하는 데 자본주의는 역부족이다. 지적 재산권 문제만 해도 자본주의는 한계에 도달했다. DVD가 거의 사라지고 있다. 음악·영화 등의 데이터가 ‘해적’ 활동을 통해 이동하고 있다. 거의 공산주의적인 현상이다. 새로운 공동체적 질서가 생성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사유재산에 기초한 자본주의가 이런 문제를 다룰 수 없다고 본다.
 금융이나 환경, 이민 문제는 자본주의가 통제할 수 없는 분야다. 베를린 장벽은 사라졌지만 여기저기서 새로운 장벽을 쌓아 올리고 있다. 미국은 미국-멕시코 국경에, 그리스·불가리아는 터키와의 국경에, 터키는 시리아와의 국경에 장벽을 쌓고 있지 않은가. 패러독스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상품의 이동 측면에서는 글로벌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동 측면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이주 제한은 어떤 문제를 발생시키는가.
 “우리들은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에 접근하고 있다. 완전한 시민이 있고, 그늘에서 살고 있는 불법 이민자들이 있다. 나는 모든 선진국의 국경을 완전 개방하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하면 결과는 완전한 혼돈이다. 하지만 현 상태를 방치하면, 무질서는 점점 더 증가한다. 내전을 방불케하는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엄격한 제한이 필요하다. 지금 이대로 가면 누구도 살고 싶지 않은 아파르트헤이트 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소수의 부자와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격리돼 살게 될 것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당신 미쳤냐’고 반응한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미 할리우드도 알고 있다’. 최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종말 이후(post-apocalyptic)’의 세상을 다루고 있다. 대놓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지만, ‘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 계급 사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비밀리에 논의되고 있다. 위험한 상황이다.”

 -앞으로 도래하는 것은 ‘자본주의 2.0’인가 ‘공산주의 2.0’인가.
 “공산주의 2.0이라고 말하겠다. 옛 공산주의의 반복은 절대 아니다. 환경·정치·영성·경제의 측면에서 옛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보다도 더 나빴다. 철저히 파산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시장 메커니즘의 바깥에서 환경·금융 등의 문제에 대한 규제 방법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복지국가에도 해답이 없다고 본다. 협동조합이나 지역 공동체에서 해답을 찾자는 주장도 있는데 나는 회의적이다. 거대한 규모의 국제 조직이 필요하다고 본다.
 후쿠시마 사태를 상기해보자. 피해규모가 더 컸으면 3000만~4000만 명을 이주시켜야 했다. 누가 어떻게 그들을 이주시켜야 했을까. 사하라 사막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중국 일부 지역도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반면 따뜻해지고 있는 시베리아는 새로운 농업 생산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전 지구적 차원의 이주가 필요하다. 옛날에는 이주가 필요하면 전쟁을 하면 됐다. 지금은 아니다. 세계의 모든 문제가 새로운 형태의 대규모 국제적인 협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 준비도 능력도 없다.”

 -무엇을 해야 하나.
 “나는 모른다. 나는 명료한 아이디어가 없다. 내가 아는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면 위험한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냉전시대에는 미·소라는 초강대국이 있었고 게임의 법칙이 명확했다. 오늘날 미국은 유일한 국제 경찰관이 아니다. 바야흐로 도래하고 있는 다극체제는 19세기 말 상황과 유사하다. 국제사회의 규칙이 불명확했기에 결과는 세계전쟁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와 서구가 충돌하고 있다. 확실한 규칙은 없고 신경만 날카로운 가운데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른다.”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달하면 국제정치를 포함해 모든 게 확 바뀔까.
 “틀림없이 그렇다. 몸과 정신의 특질이 바뀌게 될 것이며 새로운 통제 방식이 부상할 것이다. 새로운 인류가 등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간단하지 않다. 비관론자들은 인류가 로봇처럼 된다고 말한다. 낙관론자들은 인류가 새로운 영적인 통합을 달성한다고 예측한다. 기술 진부의 여파는 어떤 모습일지 확실하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투쟁’이 계속된다는 점이다.”

 -우려할 만한 투쟁은?
 “아랍 세계뿐만 아니라 서구에서 근본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그들이 목도하고 있는 ‘미친 듯한’ 역동적인 변화는 너무 심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새로운 근본주의에서 안정감을 찾는다. 문제는 근본주의가 기술 측면에서는 보수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슬람국가(IS)만 해도 기술 면에서는 초현대적이다. 근본주의와 초현대적 디지털·무기 체제의 결합은 위험하다.”

 -한국을 어떻게 보는가.
 “한국은 운 좋은 나라 중 하나다. 나는 한국을 정말 좋아한다. 한국의 문화에 대해 공부했다. 경탄을 금할 수 없다. 한국 영화도 좋아한다. 내 조국 슬로베니아도 강대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다. 중국·일본·러시아 사이에 끼어 있는 한국은 ‘의기양양하게(triumphantly)’ 성공했다.”

통일, 南이 北 기다리며 관찰해야
-한국에 문제가 있다면?
 “경제보다는 정치적·심리적 문제가 더 시급하다고 본다. 한국의 젊은 세대는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일에 중독됐다. 미친 듯이 일하며 야심도 크다. 한편 컴퓨터 게임 등 손쉬운 쾌락(fast pleasure)에 빠져 있다. 늘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내 아들이 그러는데 국제 컴퓨터 게임 배틀에서 한국인들이 참가하면 보나마나 진다고 했다.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나는 한국인 게이머들의 정열을 높이 산다. 하지면 장기적으로 이러한 심리적 불안정 상태가 파국을 부를 수 있다.
 한국은 잘하고 있다. 번영을 누리고 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암흑기에 대비해야 한다. 암흑기에는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또 현명하게 된다.”

 -해결책은 어디에 있나.
 “흔히 전통 종교와 문화를 복원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다. 최소한의 공동체 의식을 되살리기 위해서다. 중국 또한 종교의 정치화를 막는 한편 종교를 후원한다. 사회 불안정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전통에 해법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어쩌면 새로운 해답이 한국에서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철학은 세상을 바꿀 수 있나.
 “철학이 세상을 바꾼 적은 없다. 철학의 공헌을 과장하면 안 된다. 철학자가 할 일은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문제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당신들은 문제가 뭔지 안다고 생각하지만, 당신들의 문제 인식 자체가 문제다’라고 말해야 한다. 세상은 바뀌고 있지만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잘 모른다. 변화 속에서 ‘자유란 무엇인가’ ‘어떤 자유인가’ ‘지금의 자유는 충분한가’ 같은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게 철학자들이다.”

 -경희대 석좌교수이기도 한데 한국 학생들은 어떤가.
 “놀라운 학생들이다. 진지하고 겸허하고 열심히 공부한다. 미국 학생들은 어려운 철학자들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잘 모르면서도 토론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싫다’ ‘좋다’를 예단한다. 나는 미국 학생들에게 ‘일단 알고 나서 싫어하라’고 말한다. 한국 학생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철학과 철학자들을 이해하려고 한다. 내가 한국말을 몰라 한국인의 지적 세계로 침투할 수 없어서 아쉽다.”

 -엄청난 다작인데 비결은?
 “옛 유고슬라비아 당국의 ‘탄압’ 덕분이다. 학생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교수직이 아니라 연구직으로 나를 배치했다. 덕분에 마음껏 연구하고 공부할 수 있었다.”

 -한반도 통일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국에는 아무런 책무가 없다. 통일은 북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에 달렸다고 본다. 북한 정권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북한은 이미 국제적인 정보 유통 체제에 편입되고 있다. 북한은 붕괴한다. 한국이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한국은 기다리고 관찰하고 조심하면 된다. 한국이 너무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도 없다고 본다.”


슬라보이 지제크 옛 유고슬라비아 출생의 대륙철학자다. 정치이론·영화이론·이론정신분석학의 대가다. 사회현상을 라캉의 정신분석학, 헤겔 철학과 마르크스주의 경제비판이론으로 해석한다. 현재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 사회학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이자 유럽대학원(European Graduate School) 교수다. 시카고대·컬럼비아대·프린스턴대에서 교환 교수로 재직했다.


김환영 기자 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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