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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진급 위해 주말도 회사서 열공, 아내와 일요일 브런치 남의 일

중앙일보 2014.11.22 00:42 종합 13면 지면보기
자신을 내세우긴 어려운 자리, 윗사람이 고충을 알아주면 좋지만 먼저 말하긴 힘든 직책, 직장 생활에 익숙해지기 무섭게 가정 또는 결혼이란 새 고민을 안은 세대….


30대 3인을 통해 본 ‘2014 대리 자화상’

 조직의 손발이 돼 일하는 이 나라 대리들 이야기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대리는 자신을 내세우기 어렵다. 결과가 성공적이면 금세 “부장님 덕분입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이런 말을 할 수 있으면 그래도 다행이다. “과장 되는 게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는 넋두리도 많다. 전문직 친구와 비교되는 월급, 불투명한 앞날 생각만 하면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산더미 같은 일 앞에선 사치일 뿐이다. 일로 말하는 것, 이것이 대리의 숙명이다.





사원증을 들고 포즈를 취한 대리들. 왼쪽부터 장현(한국타이어)·이기윤(한국 GM)·이거성(대우인터내셔널) 대리.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달 초 서울 강남역 부근에서 만난 장현(38) 한국타이어 대리. 그는 10년 차 홍보맨이다. 회사에서 미는 프로젝트가 생기거나, 큰 사건이 터져도 그의 업무는 달라질 게 없다. 쉴 새 없이 전화하고 사람을 만나면서 회사의 입장을 설명하는 일이다. 40대가 코앞이지만 입사가 늦은 탓에 그는 아직 대리다. 한국타이어 본사 대리 중에서 나이로 치면 세 손가락 안에 든다. 같은 팀에 있는 여자 대리와 열 살 차이가 난다. 장 대리는 다른 회사 젊은 직원과 통화하다가 “당장 팀장을 바꾸라”고 말하는 것에도 이제 익숙해졌다. 대부분은 나중에 장 대리를 실제로 만나서 마흔을 앞둔 그의 얼굴을 보고 당황하거나 주눅 든다. 호통치는 목소리도, 정색하는 얼굴도 이제는 놀랍지 않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과장이 되고 싶었다.



 토요일을 마다하지 않고 회사에 나온 것도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서다. “임신한 아내 앞에서 책을 보고 있기가 미안했어요. 그래서 일을 핑계로 나와 ‘열공’을 했죠.” 두 달간 주말마다 노력한 끝에 그는 최근 영어시험 OPIc에서 ‘IH’ 등급을 받았다. 대학생도 쉽게 받기 어려운 점수다. 국내 기업이지만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승진 심사의 영어 커트라인이 올라갔다고 했다. 일은 계속 느는데 쌓아야 할 실력의 높이도 점점 높아진다.



일요일이었던 지난 2일 만난 이기윤(34) 대리는 새벽부터 자가용을 몰고 전남 영암으로 내려왔다. 한국GM 마케팅본부에서 일하는 그는 준중형차 크루즈 담당 브랜드 매니저다. 크루즈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모든 이벤트는 다 그의 손을 거쳐간다. 결혼 3년 차지만 아내와 함께하는 일요일 브런치의 여유는 사치였다.



 이날은 CJ수퍼레이스 최종 라운드가 열렸다. 이재우·안재모 두 선수가 출전하는 GT클래스(1400~5000cc)는 우승이 임박했다. 이번 한 번만 우승하면 시즌 종합우승이 된다. 지난 2년간 종합우승을 문턱에서 놓쳤다. 새벽부터 먼 길을 내려온 이 대리는 혹시나 차량에 흠집이라도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고 성적이 어떻게 될지 노심초사했다.



 “신혼에 본인만 이렇게 내려오는 것이 짜증 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정답 같지만 진심인 답변이 돌아왔다. “이건 일이잖아요. 그래서 아내도 이해해 줘요.” 다행히 이날 쉐보레팀은 종합우승을 했다. 차고에서 작은 모니터로 경기 장면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이 대리의 어깨도 그제야 펴졌다. 하지만 그는 그날 저녁 크루즈의 마케팅 전략안을 새로 짜러 인천 본사로 올라가야 했다.



 기자와 만나기로 했던 대우인터내셔널 에너지강재1팀 이거성(30) 대리는 급히 출장 명령을 받고 중동으로 떠나는 중이었다. 간신히 30분간 통화했다. 부족한 인터뷰는 결국 2주일 뒤에 만나 나눠야 했다. 이 대리는 해양 플랜트용 철강자재를 전 세계에 판매하는 일을 한다. 업무 시간도 대중없다. 아침에는 동남아 거래선에서 연락이 온다. 오후에는 유럽과 중동, 밤이면 미국에서 e메일이 쏟아진다.



 그나마 요즘 자신의 회사를 배경으로 촬영되고 있는 인기 드라마 ‘미생’은 쏠쏠한 재밋거리다. 하지만 그마저도 ‘본방 사수’를 즐길 여유는 허용되지 않는다. “미생을 보면 힘들게 일하는 장면이 그려지긴 했어도 로망이 있잖아요. 하지만 실제 업무는 말 그대로 현실이죠. 해야 할 일은 점점 많아지고 시간은 그대로죠.”



 이 대리는 내년 5월 결혼을 앞두고 있다. 화목한 가정을 꿈꾼다고 했다. 하지만 선배들은 안다. 바이어 미팅, 보고서 작성, 현장 영업, 회식에 접대까지 이어지는 생활 속에서 가정에 충실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초면이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정말 화목한 가정이 가능하다 생각하냐”며 돌직구 질문을 던졌다.



 “저희 동기끼리는 화목한 가정보다 임원 되는 게 더 쉽겠다는 이야기를 하기는 해요. 하지만 누구나 꿈은 있으니까요.(웃음)”



 지난 18일 세 명의 대리와 다시 한 번 만났다. 추가 인터뷰 겸 사진 촬영을 위해서다. 한 시간가량 진행된 스튜디오 촬영 동안에도 대리들의 직업병은 드러났다. 이기윤 대리는 촬영하는 순간 순간 골똘히 생각에 잠기며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장현 대리는 몇 차례씩 회사 관련 뉴스가 있는지 여부를 스마트폰으로 검색했다. 이거성 대리는 촬영 중간중간에 바이어의 문의 전화를 처리했다. 심지어는 전화를 받으면서 사진 촬영을 하기도 했다.



 쉴 틈 없는 대리의 삶은 취업포털 인크루트에 의뢰해 실시한 조사에서도 나타났다. 전국의 대리 26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8.9%인 155명이 ‘행복하지 않다’고 답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26.9%) ▶만족스럽지 않은 급여(23.2%) ▶업무에 대한 책임감(12.2%) 등이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꼽혔다. 86%(226명)가 ‘승진은 하고 싶다’고 답했다. 이유로는 돈, 자아실현 등이 꼽혔다. 그러나 7명에 한 명꼴(14%)로 ‘승진을 원하지 않는다’는 답도 나왔다. ‘조용히 오래 근무하려고’ ‘업무에 책임지기 싫어서’ 등의 이유를 댔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인생의 목표를 묻는 질문이다. 화목한 가정이 119명(45.3%)으로 가장 많았다. 2위인 높은 연봉(38명)과 세 배 이상 차이가 났다. 하지만 승진을 한다면 어디까지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는 51%인 134명이 ‘임원’이라고 답했다. 둘 중에 무엇이 꿈으로 남고 무엇이 현실이 될까.







[S BOX] 최악 상사, 후배 업적 가로채고 중요한 결정 미루고



“자기가 무식한 걸 모르고, 권위적인 것도 모르고, 심지어 (나와) 친해지려고 하는 선배.”



 정유업계의 한 대리가 꼽은 최악의 상사에 대한 평이다. 20명의 대리에게 이름을 밝히고는 하기 어려운 얘기를 물었다.



 -최악의 직장상사는.



 “후배 결과물을 자기 업적으로 보고할 때.” “일 중독 선배.” “대접은 원하면서 업무에선 피해만 준다.” “감정 기복이 심하다.”



 -대리라서 화날 때는 언제인가.



 “다른 팀에서 과장이나 팀장부터 찾을 때.” “중요한 결정을 상사가 내게 미룰 때.” “내 말이 맞는데 묵살될 때 화가 난다.”



 -급여에 만족하고 있나.



 “육아를 시작하면 부족할 것 같다.” “아마도 만족하는 사람이 적을 듯.”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



 “사표 내고 세계 여행.” “내 집 마련.” “자영업.” “임대사업자.”(“없다”는 답변도 꽤 있었다.)



 -자식에게 지금 하는 일을 물려주고 싶은가.



 “지금의 상사가 없다면 물려주겠다.” “그렇다. 배울 게 많다.”



 -이직을 한다면 어떤 곳을 원하나.



 “스트레스 덜한 곳으로.” “잘나가는 신생 기업.” “외국계 금융권.” “나를 인정해 주고 필요로 하는 곳.” “어딜 가도 다를 것 없다.”



 -가장 부러운 사람은.



 “아빠 회사 재직자.”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과감한 결정과 도전으로 인생을 바꾼 대표적 인물).” “없다.”





영암·서울=이현택 기자 mdfh@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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