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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색칠하기 열풍 일으킨 『비밀의 정원』 작가 배스포드

중앙일보 2014.11.22 00:39 종합 14면 지면보기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꽃과 나비에 둘러싸여 사는 조해너 배스포드. 작업실 앞에 선 배스포드와 그의 작품을 합성시켰다. [사진 조해너 배스포드]
동요 ‘아빠와 크레파스’가 생각났다. ‘(어젯밤 아빠가 사온 크레파스로) 그릴 것은 너무 많은데 하얀 종이가 너무 작아서 아빠 얼굴 그리고 나니 잠이 들고 말았’다는 꼬마가 떠오른다.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일까. 요즘 한국의 많은 어른이 색연필을 다시 잡고 있다. 꽃과 나무가 숨을 쉬고, 나비와 별이 춤을 추는 ‘책 속의 정원’에 하나하나 색을 입혀가고 있다. 알록달록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들거나 완성된 작품을 온라인에 올려 서로 비교하기도 한다.


세금 걱정 없는 꽃들에 취해 보세요 … 행복이 찾아옵니다

 발원지는 영국 일러스트레이션 작가 조해너 배스포드(31)의 『비밀의 정원』(원제 Secret Garden)이다. 그가 빚어낸 흑백의 세밀한 그림이 독자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지난 8월 말 출간된 이후 화제의 만화 『미생』과 종합 베스트셀러 1~2위를 다투며 누적 판매부수 12만 부를 넘어섰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농축한 소설책도, 세상살이 비법을 일러주는 처세서도 아닌, 단지 검은 선과 하얀 종이가 전부인 담박한 그림책이 신드롬을 일으킨 건 전에 없었던 일이다.



 스코틀랜드 북부 애버딘에 살고 있는 배스포드를 e메일로 만났다. “한국인들이 내 책을 좋아한다니 스릴을 느낀다”고 말한 그는 기자가 보낸 질문에 또박또박 답변을 보내왔다. 한 획 한 획 정교한 그의 작품을 닮았다.



조해너 배스포드는 흑백 이미지를 고집하는 일러스트레이터다. 작품은 다양하지만 모티브는 항상 자연에서 따온다. 그리고 작업 과정을 개인 홈페이지(www.johannabasford.com)에 공개한다.
 - 뜻밖의 현상이다. 기자도 놀랐다.



 “첫 목표는 내가 소장하고 싶은 컬러링 북을 만드는 거였다. 그런데 많은 나라에서 호응을 보내줬다. 한국에서 잘 팔릴지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인터넷과 페이스북에서 스파크가 이는 것을 보았다. 소셜 미디어를 보면 트렌드를 알아챌 수 있다.”



 - 14번째로 한국에서 발간됐다. 지구촌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요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사람들이 스스로를 책 속에 풀어놓고 잠시나마 번잡한 일상(특히 디지털 문화)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모니터를 응시하는 대신 아날로그의 창조 행위에 몰입할 수 있다. 모든 작품을 손으로만 그렸다. 컴퓨터로 만들 수 없는 촉감과 질감을 내려 했다. 어린 시절 색칠놀이에 대한 향수도 있을 것이다. 세금도, 영수증도, 어떤 책임도 없는 그런 자유로운 시절 말이다.”



 - 조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다.



 “할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서안 애런섬에 있던 한 정원의 수석정원사였다. 여름방학이나 크리스마스 휴일에 할아버지·할머니와 함께 보냈다. 정원만큼 훌륭한 놀이터는 없었다. 아름다운 화단 가운데 꽃시계가 있었고, 담장에는 벌집이 숨어 있었다. 담쟁이가 무성한 여름별장과 화분이 가득찬 온실도 있었다. 상상력을 키우는 환상적 장소였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어린 시절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다.”



 -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나.



 “내 예술적 기질을 키워주셨다. 우리 집안에서 유일하게 그림을 그릴 줄 아셨다. 재단·자수 솜씨도 뛰어났다. 미술용품을 사다 주셨고, 미술관에도 데려다 주셨다. 어떤 물건이든 이것저것 만들고, 실험할 수 있게 해주셨다.”



 - 평소에 ‘잉크 전도사(Ink Evangelist)’를 자부해왔다. 무슨 뜻인가.



 “픽셀(화소)보다 펜을 높게 친다. 구불구불 손으로 그린 선을 보면 뭔가 본능적으로 꿈틀대는 게 느껴진다. 우리 영혼의 일부를 포착하는 것 같다. 어지럽고 불완전한 것, 우리의 지문을 닮은 것, 그런 이미지가 중요하다. 컴퓨터 작품에는 온기, 즉 사람 냄새가 결여돼 있다. 삭막하고 냉랭하다. 디지털이 대세지만 나는 손때 묻은 손이 좋다. 매일매일 책상 위의 잉크와 함께하는 게 즐겁다. 내 살을 베면 검은 잉크가 피처럼 흘러나올지 모른다.”



 - 컴퓨터를 전혀 쓰지 않나.



 “그럴 순 없다. 고객들은 디지털 파일을 요구한다. 연필과 펜으로 작품을 완성하고, 컴퓨터로 스캐닝한다. 종이에 남아 있는 얼룩을 제거하고, 세부를 매만지고, 작품 크기를 조정한 다음 파일을 전송한다. 하지만 컴퓨터는 작업의 일부분이요 수단일 뿐이다.”



 - 시골 생활의 장점을 꼽는다면.



 “부모님께서 양어장을 하셨다. 어머니가 TV를 멀리하셔서 주로 밖에서 놀며 자랐다. 굴을 파고, 강에서 노를 젖고, 자전거로 동네를 돌고 등등,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고 모험을 즐겼다. 지금 사는 곳도 내가 자랐던 곳에서 10마일 정도 떨어져 있다. 남편과 4개월 된 딸, 그리고 개와 함께 산다. 작업실도 집 안에 있다. 그런 고독감이 좋다. 나는 철저한 시골 아낙이다. 콘크리트나 자동차, 네온사인 불빛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른들 색칠하기는 요즘 지구촌 곳곳에서 유행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가 세계의 히트상품을 정리한 『2015 한국을 뒤흔들 12가지 트렌드』에도 포함됐다. 2년 전 프랑스에서 나온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100가지 채색 앨범』이 효시로 꼽힌다. 재미와 치유를 겸비한 새로운 취미로 떠오르고 있다. 스마트폰에 포위된 정신을 맑게 하는 ‘디지털 디톡스(해독)’ 효과가 주목받고 있다. 불경기에 큰돈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국내에서도 『네이처』 『아트 테라피』 『블링블링 일러스트 컬러링북』 『명화의 숲』 등 색칠하기 책이 잇따라 나왔다.



 - ‘안티- 스트레스 북’을 표방하고 있다,



 “행복의 심리학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읽었다. 시간과 공간을 망각할 만큼 무언가에 몰입했을 때의 만족감을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림 그릴 때의 내 상태가 그렇다. 독자들도 그런 평정한 마음을 얻기 바란다. 그림에 소질이 없는 사람은 연필과 종이를 집었을 때 주눅이 들겠지만 이미 제시된 흑백의 공간을 채워가는 일은 공포스럽지 않다.”



 - 처음부터 성인 독자를 노렸나.



 “어른용 채색 책을 정말 만들고 싶었다. 그들의 창조성을 자극했으면 한다. 유치원 색칠시간에 혼이 난 적 있다. 윤곽선을 빨갛게 칠하고, 원래 그림에 없던 모양을 몇 개 덧붙였더니 ‘마음이 좁았던’ 선생님이 그냥 있는 대로만 하라고 꾸짖으셨다. 이번 책에 여백을 둔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독자들 맘대로 꽃과 나뭇잎을 추가해도 된다. 색채의 반란을 일으켰으면 한다. 그게 자신을 표현하는 거다.”



 - 그림이 치밀해 작품을 완성하는 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되레 스트레스가 쌓인다는 독자도 있다.



 “솔직히 말해 나도 내 작품에 색을 끝까지 칠해본 적이 없다. 하나라도 디테일(세부 문양)을 더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스트레스 받을 필요까지는 없다. 내가 원하는 건 독자의 성취감이다. 일관된 이야기가 있는 게 아니니 어느 페이지에서 시작해도 상관없다. 한 페이지를 마치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도 된다. 여기에선 나비를, 저기에선 꽃을 칠해도 무방하다. 『비밀의 정원』에는 정도(正道)가 없다. 당신이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



 - 스타벅스·나이키 등과도 일해왔다.



 “음반이나 책, 옷과 도자기 등에 줄곧 자연을 소재로 한 흑백 이미지를 입혀왔다. 지금까지 50개 가까운 회사의 주문을 받았다. 흑백은 이제 내 등록상표가 됐다. 방향을 틀 계획이 없다. 주위에선 컬러 작업을 하면 일감이 더 많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작가라면 남들과 구별되는 개성,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흑백을 고집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한국 회사 몇 곳과 접촉했지만 구체적인 걸 밝힐 단계는 아니다.”



 - 좌절과 시련도 있었겠다.



 “2005년 스코틀랜드의 한 미대를 졸업한 이후 별다른 일거리가 없었다. 1인 스튜디오를 세웠지만 파트타임 일을 두 개나 해야 했다. 앞날이 불안했다. 내 포트폴리오를 보이려고 고향 애버딘에서 런던까지 12시간 심야버스를 타고 갔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와야 했다. 몸은 녹초가 됐지만 잘할 수 있다는 열정은 잃지 않았다. 예전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다음 그림은 그전 것보다 더 잘 그려야 한다’고 했다. 내 삶의 모토가 됐다.”



 - 다음 책이 궁금하다.



 “『마법의 숲』(원제 Enchanted Forest)이다. 『비밀의 정원』처럼 책 곳곳에 동식물과 이런저런 물건을 숨겨놓았다. 숲 속 성 안에 갇힌 무언가를 찾아 길을 떠나는 내용이다. 그림은 이미 다 그렸고, 내년 봄께 출간될 예정이다. 『비밀의 정원』보다 더 세밀하고 정치해졌다.”







[S BOX] 배스포드가 몸소 익힌 일러스트 비결





일러스트레이션은 경쟁이 치열한 분야다. 예술가 자질과 사업 수완이 요구된다. 서른 하나라는 젊은 나이에 기반을 다진 배스포드에게 그 비결을 물었다. 그는 “자신의 단점과 한계를 알고 이를 장점으로 돌리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궁핍했던 학생 시절 흑백 작업을 선택한 것도 “돈이 많이 드는 컬러보다 흑백이 훨씬 경제적이었다”며 “종이를 구하려고 야채도 가장 싼 것을 사서 먹었다”고 했다.



 배스포드는 후배 디자이너에게 주는 충고를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놓았다. ‘미술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것’ 50가지를 공개했다. 그중 눈에 띄는 몇 가지를 간추렸다. 전문은 ‘johannabasford.com/blog-article/297’에서 볼 수 있다.



 ▶포트폴리오를 잘 만들어라=고객은 당신의 학점이나 학위논문에 관심이 없다. 특히 온라인 포트폴리오에 신경을 써야 한다.



 ▶TV를 치워버려라=나도 동거(현재 결혼) 전까지 TV 없이 지냈다. 그래야만 생산성이 높아진다. TV 보며 빈둥거릴 시간이 없다.



 ▶글쓰기를 완성하라=프로젝트 제안서가 매끈하지 못하면 당신의 창조성을 드러낼 수 없다. 당연히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당신만의 홈페이지를 만들라=주소에 자신의 이름이 포함돼야 좋다. 페이스북·트위터 등 SNS도 활용해 존재감을 부각시킨다.



 ▶단체 메일을 삼가라=고객 한 명 한 명에게 보내는 성의가 필요하다. e메일은 간명해야 한다. 상대 메일박스에 짐이 되지 마라.



 ▶겸손도 자산이다=이쪽 바닥은 그리 넓지 않다. 나쁜 말은 금방 퍼진다. 영양제 복용도 권한다. 몸이 아프면 경쟁할 수 없다.





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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