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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여성 혼자 10시간 걸으면? 길거리 실험 영상 봇물

중앙일보 2014.11.22 00:35 종합 18면 지면보기
본지는 지난 16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여성이 서울시내를 10시간 동안 혼자 걸으면?’이라는 주제로 실험 영상을 제작했다. 이날 오후 3시40분쯤 모델 이나은씨가 이태원 거리를 걷고 있다. [조문규 기자]


‘여성이 홀로 미국 뉴욕 맨해튼을 10시간 걷는 동안 108차례 성희롱을 당했다’는 실험 영상이 누리꾼들의 관심을 끌었다. 길거리 성희롱 퇴치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단체 ‘홀러백’은 지난 10월 28일 유튜브에 해당 영상을 공개하면서 뉴욕에 만연한 성희롱을 꼬집었다. 평범한 차림의 수재나 비 로버츠는 무표정으로 걷기만 했을 뿐인데 “어이, 아가씨” “오늘 뭐해?”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고 홀러백은 밝혔다. 아무 말 없이 몇 분간 로버츠를 뒤쫓는 남성도 있었다.

뉴욕 108차례 성희롱, 베를린은 없어
강남·이태원에선 “오 예쁜데” 단 1건



PD 로브 블리스는 허핑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수많은 여성이 길거리에서 어떤 일을 겪는지 보여주기 위해 제작했다”고 말했다. 로버츠는 “(길거리 성희롱은) 매일같이 겪는 일”이라며 “희롱하는 사람들에게 그만하라고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실험 영상은 20일까지 조회 수 3669만3466회를 기록하고 있다. 공개 이후 20여 일 동안 이 영상에는 댓글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남성에게 희롱당하는 여성이 피해자로 묘사되면서 남녀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남성은 홀러백이 “아름답다” “끝내주는데” 같은 칭찬도 성희롱으로 간주한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남성이 모델에게 칭찬을 했을 뿐”(유튜브 아이디 psychotic jackalope)이라며 “언제부터 ‘아름답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란 말이 예의 없는 말이 됐느냐”(Homemadegameguru)고 반발했다. 한 유튜브 사용자는 “대화를 시도한 남성들을 성희롱 가해자로 만든 홀러백은 사과해야 한다”(Joe Friday)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세계의 여성 누리꾼들은 반박했다. “그건 칭찬이 아니다”(Heather Spain), “당신들은 남자니까 여자 심정을 모를 것”(Chloe Donzac) 등이다. 또한 “이 영상은 여성이 명백한 성희롱 피해자라는 걸 증명한다”(Reace McDonnell)고 하기도 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페미니즘(Don John)”이라며 반감을 표현한 남성들도 있다.



위부터 10월 28일 뉴욕, 11월 4일 이탈리아 로마, 18일 뉴욕 맨해튼 길거리 실험 영상. [유튜브 캡처]
 미국 남자 모델 프랭크스터는 지난달 31일 ‘남자가 뉴욕을 걸으면’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그는 3시간 동안 30여 차례 성희롱을 당했다고 밝혔다. 여성들은 “젠장” “쟤 정말 섹시하다”거나 “어디 가느냐”고 묻기도 했다. 남성들도 “짱인데” “이리로 돌아와”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영상에 대해 세계 누리꾼들은 “성희롱은 남녀 모두에게 발생한다. ‘남성은 여성을 성희롱해선 안 된다’는 주장보다 ‘남녀 누구나 성희롱을 당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고 해야 할 것”(TheDynastymedia), “많은 사람이 응시하고 야유를 보냈지만 이 남자는 홀러백의 여성 모델과는 달리 위협받지 않았다”(Lily Ball) 등의 글을 남겼다.



 이후 ‘10시간을 혼자 걸으면 어떻게 될까’를 주제로 한 패러디 영상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20일까지 세계 주요 도시에서 제작한 영상이 60여 개에 이르고 있다. 이탈리아 로마, 독일 베를린, 라트비아 리가, 폴란드 바르샤바, 인도 뭄바이 등 실험 영상을 제작한 도시는 다양하다.



 지난 6일 히잡을 쓴 여성 모델이 캐주얼 차림으로 뉴욕을 5시간 걸었다. 히잡 복장일 때는 이 여성에게 말을 거는 남성이 없었지만 히잡을 벗으니 성희롱 대상이 됐다. 지난 4일 이탈리아 로마 실험 영상에서는 여성이 10시간 동안 “예쁜이” “결혼했니?” “포옹도 안 돼?” “싱글이니?” 등 100여 차례 성희롱을 당했다. 지난 18일 미국 맨해튼에서는 또 다른 여성이 10시간을 걷는 동안 “웃어라” “전화번호 줘” “어디가? 왜 내가 못생겼니?” “나랑 결혼할래?” 등의 말을 들었다. 지난 17일 유튜브에 올려진 알제리 실험 영상에 등장하는 화이트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은 여성은 10시간 동안 14번의 성희롱을 당했다. 영상에는 성희롱 발언들이 ‘삐’ 소리로 처리돼 있다.



 세계 모든 도시가 이처럼 성희롱이 만연할까. 지난 1일 유튜브에 공개된 독일 베를린과 라트비아 리가 영상에서는 “모델에게 몇 명이 눈길을 주긴 했지만 성희롱은 없었다”고 밝혔다. 지난 3일의 뉴질랜드 오클랜드 실험 영상은 일간지 뉴질랜드헤럴드가 촬영했다. 모델 겸 요가 강사인 니콜라 심슨이 5시간 동안 거리를 활보했다. 뉴욕에서 5년 동안 생활했다는 심슨은 “정말 멋지다. 뉴욕과 달리 사람들이 정말 예의 바르다”며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영상들을 본 누리꾼들은 “뉴욕 성희롱에 상처 받았다면 리가로 이사해라”(Aigars Mahinovs), “아무런 의사소통이 없었다니. 베를린은 아마 가장 슬픈 도시일 것”(TheGanainm), “솔직히 내가 여자라면 공들여 화장하고 머리 다듬었는데 한마디도 못 듣는 게 실망스러울 듯”(Alex Schmidtka), “유럽 남자들은 게이야”(Alphaomega150) 등의 댓글을 올렸다.



 인도 뭄바이에서 지난 9일 촬영한 실험 영상도 관심을 끌었다. 인도 여성이 분홍색 민소매에 미니스커트를 입어 노출이 다른 실험 영상에 비해 많았지만 성희롱은 없었다. 인도 한 누리꾼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인도 이미지와 달리 사실 인도는 교양 있고 예의 바른 국가라는 걸 보여준다”(Sunaina Chatterjee)고 했다. 하지만 다른 누리꾼은 “인도는 성폭행률이 가장 높은 나라”라며 “영상을 믿을 수 없다”(IamJacksColon4)고 주장했다. 실제 인도는 성폭행 사건이 끊이지 않는 나라다. 지난 4일 인디아투데이가 보도한 인도국가범죄기록국(NCRB) 통계에 따르면 인도에서는 하루 평균 92명의 여성이 성폭행을 당한다. “모델이 섹시하지 않아서”(Manobes padhy)라는 여성 비하 발언도 있다.



 서울은 어떨까. 본지는 지난 16일 KBS 20기 공채 탤런트 이나은(32)씨를 모델로 10시간을 걸으며 실험 영상을 제작했다. 오전 11시부터 2시간은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을 걸었고 오후 2시부터는 이태원에서 촬영했다. 이날 한국인의 성희롱은 없었다. 하지만 홀러백이 처음 제작한 실험 영상의 성희롱 기준으로 보면 한 건 있었다. 이날 오후 3시쯤 이태원에서 한 흑인 남성이 이씨에게 “오 뷰티플. 어디 가느냐? 한국인이냐?”고 말했다.



한편 재미동포 남성(31)은 30여 분 동안 이씨를 따라다니다 “커피 한잔할래요”라고 묻기도 했다.



 문화인류학자인 조한혜정(65·여) 연세대 명예교수는 “나라마다 다른 실험 영상 결과는 시민의식의 차이에서 비롯돼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유럽 같은 경우는 150년에 걸친 오랜 근대화 동안 비교적 인간에 대한 성찰을 많이 해오면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자리 잡은 반면, 미국은 상대적으로 타인에 대한 이해심이 부족한 편”이라고 말했다.



강선아 기자 sunnyk123@joongang.co.kr

영상 실험=김세희·최효정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S BOX] “길거리서 성적 수치심 느끼게 하면 모욕죄”



성희롱은 ‘원하지 않는 성적인 말과 행동으로 상대방에게 성적 굴욕감이나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행위’다. 법무법인 충정의 김민영 변호사는 “일반적인 생활 안에서 성희롱의 정의를 두고 있는 법 규정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특히 길거리에서는 직접적인 신체 접촉에 따른 추행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형사법으로 성희롱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했다.



 성희롱 피해자는 ‘국가인권위원회법’과 ‘여성발전기본법’ 등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 ‘남녀고용 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에 따르면 성희롱은 육체·언어·시각적 행위로 나뉘며, 피해자의 주관적인 사정과 사회 통념 등을 고려해 검토한다. 그러나 이 법률들은 근로관계를 전제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길거리·버스·지하철 등 공공장소에서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성희롱을 당했을 때는 적용되기 어렵다.



  김 변호사는 “공중이 밀집하는 장소에서 다른 사람에게 성적 언동을 해 수치심이나 불쾌감을 느끼게 했다면 성희롱은 아니더라도 형법상 모욕죄가 성립할 수 있다”며 “피해자가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한국성희롱예방센터 노신규 대표는 “최근 성희롱 피해는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며 “성별에 관계없이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법적 성희롱 인정 범위는 국가적·문화적 차이도 있다”며 “우리나라 성희롱 관련법은 직장 내 성희롱 피해를 막아 고용상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최신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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