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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지구촌 고난 치유에 기여하려면

중앙일보 2014.11.22 00:02 종합 39면 지면보기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초빙교수
두 주일 전, 벨리즈(Belize)를 다녀왔다. 기획재정부가 한국개발연구원(KDI) 주관으로 시행하는 경제발전 경험 공유 사업(Knowledge Sharing Program·KSP)의 수석고문으로 프로젝트 착수회의를 위해서였다. 주제는 벨리즈의 ‘국가 과학기술 혁신 전략 및 액션플랜 수립’ 등이다.



 지난해 TV 방송사의 10부작 기획취재 등이 인기를 끌며 벨리즈는 카리브해의 보석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멕시코·과테말라와 국경을 접한 인구 30여만 명의 나라, 1800년대는 영국령 온두라스였다가 1981년에 독립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 구매력 평가 기준)은 8000달러 남짓, 원유·설탕·과일·마호가니 등이 자원이다. 중남미 국가 중 유일하게 영어를 공용어로 쓴다.



 우리나라와의 인연은 짧다. 2012년 녹색기후기금(Green Climate Fund·GCF) 사무국의 송도 유치를 위해 막강 선두 주자인 독일 등과 치열하게 겨룰 때, 벨리즈는 카리브공동체(CARICOM) 대표국으로 우리 손을 들어줬다. 당시 민간 유치위원으로서 한 표의 절실함을 실감했던 기억이 새롭다. 내년 8월이면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 의장 선거를 놓고 또 개도국의 지지를 청해야 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GCF로 맺어진 호혜관계는 지난해 한·벨리즈 KSP로 이어졌다. 첫 과제는 ‘국가 교통 마스터플랜 수립’이었다. 마야 정글의 생물다양성 등 천혜의 자연자본을 지닌 벨리즈가 기댈 수 있는 건 관광산업이다. 심해 7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신비의 블루홀(Great Blue Hole)과 세계 2위의 산호초 보호구역인 배리어 리프(Barrier Reef)는 유네스코 자연유산이다.



 그런데 한반도의 10분의 1 정도인 벨리즈는 가로·세로를 잇는 도로망이 단절돼 있다. 게다가 해안선 둘레길은 최근 허리케인 빈발로 몇 년마다 쓸려나간다고 한다. 그러니 올해 초 한국을 찾은 벨리즈 대표단이 교통망 관제시설을 둘러보며 감탄을 연발한 것은 당연했다.



 지난 4월 말 벨리즈에서 열린 제1차 KSP 최종보고회에서 우리 대표단은 미처 예상치 못한 의식을 치렀다. 장내를 꽉 메운 행사장에서 에너지·과학기술부 조이 그랜트(A Joy Grant) 장관이 예를 갖춰 세월호 참사자를 기리는 추도식을 진행한 것이다. 우리 교통체계를 한껏 뽐내놓은 처지에 차라리 그대로 넘어가 주면 싶었는데, 내색도 못한 채 괴롭고 부끄러웠다.



 이번 제2차 KSP 착수회의 때도 공무원 100여 명이 참석했다. 벨리즈 국가의 전통악기 연주에 이어 우리 대표단이 녹음에 맞춰 애국가를 제창했다. 1절부터 4절까지, 이역만리에서 부르는지라 더 눈시울이 뜨듯해졌다. 옆에 선 KDI 실장이 4절까지 다 외우고 있느냐고 했다. 그 자리에서 스쳐간 생각이다. 국내 행사에서도 국기에 대한 경례로 국민의례를 때우다시피 할 게 아니라 4절까지 애국가를 부르며 잠시라도 나라 사랑을 상기하면 어떨까. 국회부터 나서주면 좋겠다.



 제1차 KSP 보고서를 작성하며 하나 받았으니 하나 주고 마는 식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썼다. 왕복에만 이틀이 걸리고 자원외교 가치도 별로 없는 터, 실리가 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우리를 모델로 여기는 개도국들의 리더가 되는 건 매우 소중한 일 같다. 이제 아쉬울 때만 손을 내미는 게 아니라 인류애 차원에서 타산 없이 베푸는 외교를 할 때도 됐다. 벨리즈는 이번에 국무회의에서 한국을 비자 면제국으로 정하기로 했다고 한다.



 벨리즈의 수도 벨모판(Belmopan) 방문길에 곳곳을 살피게 됐다. 우리 새마을운동을 들여보내면 딱 맞춤형 솔루션이 될 것 같았다. 공동체 스스로 농가공·주거·물·에너지·폐기물 처리 등 최적의 가용기술과 기법(Best Available Techniques) 전파운동에 나서는 것이다. 이 얘기에 주무장관은 크게 반겼다. 그들에게 절실한 것은 개인주의 극복의 공동체 정신이라며.



 그들은 제1차 KSP 사업의 최종보고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국내 사정을 보니 연구윤리 규정이 까다로워져 검증에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개도국으로의 지식전파사업에 대해 학술논문과 똑같은 연구윤리 잣대로 비용을 늘리고 시간을 지체시키는 게 합당한 일인지 모르겠다.



 해외 지원사업의 성공요건은 무엇일까. 대표단이 열정과 성실로 마음으로 통하는 자세가 기본이다. 상대국의 필요와 요구, 강점과 약점을 정확히 파악해 수요국 중심의 실질적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한국의 성공신화를 전수하되 상대국의 상황에 맞는 재창조가 필요하다. 그리고 부처별로 추진하고 있는 각종 사업의 내용을 파악·연계·상생하도록 총괄 조정하는 기능이 제대로 작동돼야 한다. 이런 조건이 충족된다면 한정된 예산이라 하더라도 지구촌 곳곳의 고난을 치유하는 데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몫은 훨씬 더 커질 것이다.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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